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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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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해당되는 글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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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통해 무언가 배워야 한다면. 4
  7. 2013.11.16
    황금알의 낳는 거위 굶겨 죽이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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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논리는 제나름의 근거와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그 나름의 설득력 역시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와 그것이 용인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기준의 차이일 겁니다.

 

전 이 두 입장이 모두 맞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남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안 되고 남을 공격하는 것도 좋지 않죠.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금지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잘 보장된 나머지 그것 남용하고 악용하며 자신의 반사회적이고 윤리, 도덕에 반하는 가치관의 표현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이런 경우 사회적 공해가 되어 듣기 싫지만 쫓아낼 수 없는 불편이 발생할 수 있죠. 누구도 커뮤니티의 어그로꾼이 열심히 활동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표현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의해 금기 내지는 낙인이 찍혀 특정 표현이 금지되어 제재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거나 납득이 발생했다고는 해도, 표현의 범위가 좁아진 것은 사실이고, 그와 유사한 경우가 반복될 경우 전례에 따라 같은 원칙이 적용되므로, 그러한 제한, 제재가 반복되어 표현의 폭이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전 이에 대한 기준이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잘 작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표현을 했을 때,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누구라도 욕할 만한 개소리를 했을 때 대중에 의한 사회적 제재가 가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하고 얼마만큼 보장할 것인가가 갈려야 한다고 봐요.

 

미국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9.11에 대한 고인모독과 조롱은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됩니다. 다만 어그로꾼에 대한 공격 역시도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이 되죠. 개소리를 하고 혐오 표현을 해도 사람들이 그 표현에 대해 마찬가지로 욕할 자유 역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 아래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반사회적인 표현, 혐오 표현에 대한 민감하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여주며 그러한 이들이 욕 먹을 소리를 했을 때 물 밑으로 가라앉게 해버리죠. 공개적으로 9.11에 대한 망언을 했다면 미국 사회는 그를 쉽게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죄를 짓거나 혐오스러운 표현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며 그에게 사회적 패널티를 가할 것이고 공개적으로 이슈가 된다면 시장이나 경찰서장 같은 이들이 기자들 앞에서 우리 지역 사회의 부끄러움이라 비판하겠죠.

 

이는 도덕적 기준이 보편적으로 자리잡혀 있고 그것이 보편적 정의나 윤리의 기준에 더 가까울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물론 이들의 대중적 차원의 사회적 제재가 정의로운가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지탄이 발생할 때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선 쉽게 마녀사냥, 인민재판, 사적제재라 거품을 물고 비판할 사람들이 있을 거고요.

 

그러나 전 욕 먹을 짓을 했다면 욕을 먹는 건 당연하다는 상식에 따라 당연히 뒤따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정의롭고 아니고를 떠나서요.

 

미국과 같은 표현의 자유가 크게 보장된 사회에선 시민의 비난 역시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만큼 비판 받을 행위를 한 사람은 대중에 의해 제재를 받습니다. 그렇게 비윤리적인 개인이나 집단, 혐오 집단의 준동을 억눌러왔던 것이고 도덕적 기준을 지켜올 수 있었으며 그렇게 도덕적 기준을 재확인해오기도 했죠.

 

물론 그게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었다면 현 미국 사회와 정치가 더 나빠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환경이 변하면 그에 맞게 반응해왔고 도덕적 기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60년대 호황기에도 흑인들은 차별받고 린치 당하며 살해됐고 여성들 역시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기준이 변하면 당연히 대중적 차원의 혐오분자에 대한 제재 역시 약해지거나 무감각해지게 되겠죠.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2010년대 이후 훨씬 커졌던 것처럼요.

 

 

반대로 법적인 제재를 통해 특정 표현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가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져야할 필요는 그러한 상황이 심각해진, 혹은 위태로운 사회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필요가 있을 경우 그러한 힘이 작동해야 할 수도 있다고요.

 

한국 사회도 반사회적 행위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은 어렵지 않게 발생했던 시절이 있고 지금도 그 관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사회적 비판을 받을 일을 했다면 온 국민이 그놈 나쁜놈이라며 욕하고 손가락질 했죠. 그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적 도덕 기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시대적, 의식적 한계로 인해 그 수준이나 지탄의 방식이 현 시대의 것을 기준으로 하면 다소 미개해 보이거나 과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그것을 어떻게 쓸지도 개인의 판단에 따릅니다. 따라서 양식 있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최대한의 자유가 주어져도 할 말과 못 할말을 구분하고, 할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여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할 겁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고 그들은 자신의 자유가 보장하는만큼 난장을 피워도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그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에 반발한다는 겁니다.

 

대중이 이들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고 그들의 난장을 반대한다면 사회적 지탄과 대중적 차원의 비판으로 그들을 수면 아래로 내려보내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후퇴시키려는 도전을 꺽어버리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게 되는 경우, 혐오가 충분히 제재받지 않아 수면 위로 조금씩 올라오고, 그 규모를 키워가게 되어 누군가 혐오 표현을 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비판과 제재를 가하려는 측의 힘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거나, 오히려 역으로 혐오세력에게 제압, 혹은 무력화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혐오 세력이 수면 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그 규모를 키워갈수록 혐오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반사회적, 비윤리적 표현을 반복할 때 파편화되고 상대적 소수에 불과했던 이들이 대중의 반발에 의해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던 것에 반해 이들은 그러한 반발에 대응하게 됩니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든 보장되고 내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 이유로 혐오 받는 건 당연하다거나, 유사해보이지만 구분될 수 있는 사례를 가져와 동일한 것이라며 자신의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 무시하고 걍 내 맘대로 할 거라며 조롱하는 경우 역시 충분히 많죠.

 

이러한 이들이 규모를 키워갈수록 기존 어그로꾼, 혐오자들에 대한 제재를 근거했던 사회적 도덕 기준은 낮아지게 될 거고 덜 도덕적이게 됩니다. 저소득 흑인이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논란이 되었을 때, 이전이라면 약자의 죽음, 혹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을 추모하고 경찰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요구했을 것을 현 시대엔 범죄나 저지르는 깜둥이의 죽음에 환호하거나 조롱하죠. 최소한 그들의 죽음에 무감각하여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비난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관계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 역시 많아졌습니다.

 

혐오 세력은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가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것이고, 그들에 대척점에 있는 이들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어 사회 보편적 도덕 기준의 후퇴를 겪어야할 것입니다. 혐오 세력의 표현들은 쓰레기 같을 지언정, 다양한 이유로 그것에 호응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호응하는 이들의 가치관이 상대적으로 더 맛이 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과 공감할 법한 주장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죠. 나치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나치가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몰랐기 때문이기 이전에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미국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 역시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그걸 얼마간 실천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세력이 성장하고 더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에 그들의 근간을 공격하거나, 지엽적으로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중의 사회적 제재, 지탄이 힘을 발휘할 수 없어 혐오 세력을 충분히 수면 아래로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사회적 도덕 기준을 지켜내기 위해서 발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지향되어야할 이점이지만 그것이 더 선한 사람보다 더 악한 이들에게 큰 힘을 주고 그들의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근거가 된다면 어느 정도 제한되어서 얻을 사회적 이익이 더 클 수 있습니다.

 

물론 모두의 표현의 범위가 조금씩 후퇴하고 제약되는 건 사실입니다. 부당한 피해자나 억울한 제재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혐오 세력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도덕적이고 양식 있는 사람의 경우 스스로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려 할 것이기에 혐오 표현에 의해 피해를 볼 지점은 혐오 세력이 비해 훨씬 적습니다.

 

혐오 세력에게는 그들의 내부적 핵심 원리와 동력원이 법적 제재로 인해 적출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대중의 경우 더 혐오 세력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이들은 얼마간 피해를 보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록 아무 피해 없이 자신의 정신건강을 해롭게 하는 외부적 공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모두가 우려하는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죠. 표현의 자유가 한번 후퇴하면 다른 경계선적 표현에 대해서도 논란이 발생할 수 있고, 저건 되고 이건 안 되느냐는 지적에 다시 한번 후퇴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표현의 제약이든, 기존 제약했던 영역의 석방이 될 수도 있겠죠. 또한 언제까지, 어디까지 제재하고 제약하는지에 대해서도 정해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는 혐오세력의 규모만큼 치열하고 지리할 것이고요.

 

무엇보다 그러한 기준을 마련해야할 정치인이 누구의 손을 드느냐에 따라서도 결정이 갈리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표현의 제약이 발생했을 때 그것은 결코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법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이유는 혐오 세력의 성장과 보편화를 막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임무가 충실히 성과를 보았을 때 제약은 유연하게 후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그러한 제약이 필요치 않다거나 그 제약의 범위와 정도를 축소시키는 쪽으로요.

 

 

이런 이유로 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와 표현의 제약이 발생하더라도 처벌하는 사회는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얼마나 잘 작동하고, 혐오 세력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잘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제재가 반드시 정의롭거나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그 사회가 가진 도덕적 기준과 상식에 대한 증명이자 확인이기 때문에 마녀사냥, 인민재판이라는 비판으로 일축할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욕먹을 짓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건 당연한 겁니다. 잘못을 했는데 마녀사냥이라고, 인민재판이라고 그 입을 다물거나 공격을 금지시키는 것 역시 대중이 향유하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이고요.

 

혐오 세력은 혐오를 동력으로 성장하고 그 성장은 외부 자원을 받아들여 이루어집니다. 대중에 의해 제재받지 않고 억눌려지지 않거나 그러한 사회적 제재를 금지하여 그들을 방치할수록 혐오 세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혐오 세력이 대중에 의해 무력화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제약을 감수하고서라도 법적으로 제재하는 건 필요한 선택지로 고려됨에 마땅합니다. 할 수 있느냐와 별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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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이나 워마드가 페미나치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코나치, 페미나치, 피보나치, 문법나치, 네오나치 등 뒤에 나치가 붙는 것들은 그 행태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서 붙는 건데,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극단주의자들을 나치에 비유하는 거죠.


여기서 본질 타령하면 그럼 그 본질이 뭐냐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페미니즘은 여성이 불평등하게 차별, 억압 받고 상대적으로 낮은 여권을 신장시키며 성평등을 추구하는 운동 내지는 사상입니다. 이게 본질이죠. 메갈이 페미니즘이려면 여권의 신장을 주장해야 합니다. 남성의 거세를 주장할 게 아니라. 페미니 남성우월이니 어쩌고 할 꺼면 좀 배우고 입을 털어야 합니다.


리얼 페미니즘 알못들이 메갈 쉴드치려고 여성우월주의랑 페미니즘이랑 구분도 못하는 꼬라지보면 진짜 답답합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권력이 적고 차별 받는다면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야지 자본가들 머리를 돌로 까야 됩니까? 똥멍청한 거죠.


남성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걸 낮추는 거랑 애비충 똥꼬충 명예ㅈㅈ 한남충 거리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납득 가능한 합리적 설명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남성권력을 휘두르는 걸 막는 거랑 그거랑 똑같은 짓꺼리 하는 게 진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폭력에 대한 폭력은 개싸움이지 발전적 토론이 아닙니다.


미러링 어쩌고 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실상은 그저 방종한 욕구와 가학적 쾌락을 즐기는 데에 있어요. 성차별, 페미니즘, 남성우월, 여성혐오.. 자기들이 내세운 명분이라지만 그건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일베가 스스로 애국보수나 우파를 자칭하지만 실상은 방종한 집단에 불과하듯이요. 


미러링을 하려면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그 논리를 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있지도 않은 허수아비 만들어서 싸우거나, 자기들 가학적 쾌락을 위해 특정한 대상이나 논리 없이 남성을 혐오한 뒤 미러링이라고 변명하는 게 아니라요. 미러링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과 논리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똑같은 주장과 논리에 단어 몇개 바꾸면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그 논리적 허술함과 주장의 멍청함을 조롱하는 비판법이죠. 자세한 건 아래의 글로.


2016/05/20 - [취미/이야기] - 조롱적 비판. 올바른 미러링 방법.


앞서 말했듯 메갈은 성평등이니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이 내세울 수 있는 성평등, 페미니즘, 여성혐오에 대한 대항, 남성우월에 대한 반발은 그저 변명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정말 그런 것들을 위해 움직인다면 여성의 권익과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지 남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휘둘러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일베가 자신들의 방종한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국보수나 우파와 같은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이용한 것과 같습니다. 메갈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고 보장 받을 수 있을만한 명분과 정당성을 찾았을 뿐이고 그게 성평등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요소들일 뿐이죠.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건? 남성에 대한 거세죠.


솔까 여성들이 진짜 성평등을 위할 줄 안다면 메갈 같이 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 더 적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동안 남성권력에 의해 억눌려졌던 여성이라면 이 반발 때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A 스프링과 B 스프링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때 B 스프링에 의해 A 스프링이 눌려왔다면 그 힘만큼 그 반발심도 더 강할 수 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A 스프링이 반발할 때 반대로 B 스프링도 똑같이, 혹은 더욱 압축될 겁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죠. 그 동안 여성이 억눌려왔다면 그 압력이 줄어들 거나 반발할 수 있을 때 더 크고 강한 반발력이 발생할 겁니다. 지금처럼요.


하지만 사람은 스프링이 아니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거기서 멈출 수 있다면 훨씬 성평등의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개개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며 성평등에 가까워지고 사태가 잦아들며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듭니다. 하지만 언젠간 그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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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본인이 다음 팁에서 한 것입니다.


인간 중심주의란 인간이 세상, 우주, 지구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사고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관의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중심주의'들과 같은 비판점을 가지고 있는데, 당연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그리고 그 기준이 합당한가가 그렇지요. 가령 우리는 자문화중심주의가 왜 나쁘고 합당하지 않은지 알고 있죠. 나치의 게르만중심주의도 마찬가지고요.



인간 중심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문명과 지성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오만한 판단이 옳다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마따라, 인간이 가장 위대하고 고귀하며 뛰어난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거죠? 인간만이 문명을 이루고 뛰어난 학문을 이루며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킬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렇다면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겁니까? 인간이죠. 인간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내고 그 기준에 들어맞으니 자기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겁니다. 자위하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렇게 따지면 어느 박테리아 스스로 자기네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쪽수가 많으니 쪽수라는 기준으로 자기가 가장 위대하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고 정하면 그게 맞는 말일까요?


조류 중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지닌 것이 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닭 스스로 날개가 있고 깃털이 있으며 가장 개체수가 많은 조류가 가장 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구를 지배한다는 기준을 설정한다면 닭이 지구를 지배하는 위대한 생물이 되겠죠.



그런 겁니다. 인간 지 혼자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으니 내가 짱이라고 하는 게 바로 멍청하다는 거죠. 오만하고, 이기적인 독선입니다. 생명에 경중은 없다는 금언에 따라, 모든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고 그 자체로 당위를 가지는 것이기에 어느 종족, 어느 생명을 자기 편의에 따라 필요있네 없네, 중요하네 그렇지 않네를 따질 순 없습니다.



같은 논리를 사용한 나치의 경우, 게르만족만이 가장 위대하고 고귀하고 뛰어난 인종이라고 하죠. 나치, 게르만족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말입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게르만족을 제외한 다른 혼혈, 황인종, 흑인종 및 비게르만 백인종은 모두 쓰레기 인종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왜 그게 개소리인지 잘 알고 있고요. 같은 논리라면 인간 중심주의자도 그에 대해 할 말은 없어야 합니다. 같은 인간이니 다 똑같다고? 게르만 중심주의자에겐 '다른 인종'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인간이고, 모두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주의가 헛소리인 이유입니다.



물론 반대로 다른 생물이 인간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고, 똑같이 죽을 수 있을 때 닭보단 사람을 구하는 게 맞겠죠. 이기심이든, 도덕심이든 인륜이든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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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그들이 집권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들 국민이 지지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그러한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없고 온갖 민주주의 살해를 자행해왔으며 이는 결국 히틀러의 독재와 2차대전의 발발이라는 지옥을 만들었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특기할 수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데, 바로 근대 인간 이성과 파시즘의 발흥이 바로 국민들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함은 우리가 가장 눈여겨 봐야할 역사적 사실이고 또한 민주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데, 바로 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음이라는 거죠. 히틀러라는 파시스트는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당선되었고 독일을 지배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국민들이 주권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국민이 최고 주권자라면, 국민투표에서 허가를 받은 경우에 국가는 국내의 외국인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혹은 국민 다수의 결정이라면 국민 일부의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무조건적인 착취, 혹은 차별에 아무런 하자가 없을 수 있을까요?


주권 이상의 권력이 없다면 이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권을 최고의 존재로 둔 주장이 바로 독일의 칼 슈미트가 주장한 결단주의지요. 이 관념에 따르면 주권이야말로 모든 질서와 규범의 원천이고 따라서 주권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를 겪고나서 그들 헌법의 첫머리를 바꿨지요. 앞서 말했듯이, 독일의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파괴되었고 히틀러 또한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당선된 것이니까요. 이러한 경험 아래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으로 알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국민들이 원한다 하여도 헌정질서는 스스로 종료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주권의 제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방어적 민주주의라고 부르지요.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이지만 주권자가 원한다고 해서 죄 없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구속하거나, 기본권을 제한하는 등의 일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방어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사실은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제도이기 때문이지요.



최근 통진당 해체선언을 두고 민주주의의 자살이라고들 평합니다. 네, 사실입니다. 그 독일도 정당강제해산은 대표적인 헌정파괴행위라 여기고 있고 적어도 그 과정에 있어서 충분히 한국보다 선진적이며 민주적이었습니다. 예컨데 그들이 그들의 사상을 표출하며 시위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맞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요.


하지만 한국의 통진당 해체는 그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었고, 실제로도 굉장한 무리를 하면서 벌인 '사건'입니다. 뭐, 통진당 스스로 병신짓을 자행한 것도 사실이고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법적인 문제점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진당 해체가 가능했던 것은 또한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국민들이 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죠. 국민들 스스로가 헌정질서를 위협하고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당선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새누리당과 박근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일을 못하는 아마추어 이하의 정당 및 정권이며(만약 당신이 생각이 다르다면, 당신이 '상식적인 정상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로요.)   그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상당한 수준인 데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절대 지지 않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에 맞서는 자들이 무능하고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국민들이 그들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 시절과 마찬가지로 얼토당토 않은 선전과 선동에 국민들은 놀아나고 있고 비상식적인 일을 전혀 그렇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상식적이라 여기는 데다가, 그들이 규정한 적에 대한 모든 폭압과 폭력적 대우는 언제나 정당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힘들고 먹고 살기 어려우며,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더 수준이 떨어진 '미개한' 상태로 걸어가는 것은 실질적으로 국민들 수준이 딱 그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통진당 해체와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등을 비롯한 온갖 반민주적이고 법치에 대한 살해를 저지르는 범죄행위가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지 않으며, 국민들이 국가적인 평화와, 개인적인 안전과, 경제적인 안정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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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는 항상 자신들은 가식적이지 않고 다른 커뮤니티나 사람들은 죄다 가식적이라는 망상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그냥 지들이 천박하고 미개하여 도덕과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일 뿐인데요. 생각해보세요, 현실에서도 일베에서 쓰는 표현을 그대로 모두에게 짓껄이지 않는 것은 가식이 아닙니까? 가식이죠.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보고 일베의 가식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트위터에서 벌어진 일밍아웃 = 동성애자 아웃팅, 나치 치하의 유대인 색출이라는 등식의 논란에 대한 것입니다.



쟤네들은 다 저렇죠. 대충 비슷해 보이는 거 갖다 붙혀놓고 동치시키려는 거. 윤서인도 비슷한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대충 비슷해보이면 다 똑같다는 건 데, 애들이 생각이 없고 배운 게 없으니까 그러한 요소들이 갖는 의미와 차이,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깡그리 무시를 합니다. 


'유대인과 동성애자가 혐오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 '일베충도 혐오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 '고로 유대인과 동성애자가 탄압받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일베충도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개멍청한 거죠.


이게 바로 비상식인의 행동형태입니다. 이중잣대. 내가 억울하고 불만있으면 그건 잘못된 거고 그게 아니면 상관없다는 것. 같은 편, 같은 집단이 욕을 먹으면 내가 욕을 먹은 거고 욕하는 쪽이 잘못된 것이고 자신과 자기편의 상대방에 대한 끝도 없는 공격성과 혐오는 언제나 정당하다는 거.



유대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잘못됐잖아? 그러니 마찬가지로 일베충 혐오와 차별은 잘못됐어.


그렇지만 전라도인은 개객끼고 좌파는 종북이야. 하는거죠.



il관성 없는 그들의 태도를 일베충 스스로는 절대 자각 못하고 있습니다. 내부논리에 의해 그래도 우리는 올바르다. 라고 자가세뇌를 하겠죠.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명백한 피해자로서, 인종주의 사상에 의해 탄압받고, 음모론과 나치의 선전 선동과 기존 유럽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유대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합쳐진 것으로 분명히 나치가 잘못한 것입니다. 동성애자의 경우 역시 그들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정받아야할 정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라는 것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만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죠.


하지만 일베충은? 그 스스로가 극단적인 태도와 언행을 일삼으면서 타 지역민, 이성, 다른 정치적 신념과 이념을 가진 상대 등에 대한 명백하고 확고한 공격성과 차별의식을 가지고 실제로 그러한 사상에 따라 그들을 폄하, 비난, 공격합니다. 그러한 바탕에는 스스로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데, 예컨데 일베충이 조작한 일명 김치년 자료는 실제로 존재하며 타 커뮤니티에서 분탕질을 하거나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그들 사이트에 인증하고 주목을 받기도 하며 최근에는 실제적인 폭탄테러 행위를 저지르기 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커뮤니티에서 흔하게 쓰는 표현 또한 성차별적, 지역차별적, 정치적 극단주의적, 선정적, 폭력적이기 그지 없지요. 고인에 대한 폄하, 모독과 성적인 유희대상으로 쓰는 것 또한 실제로 벌어졌고 그로 인한 처벌 또한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요컨데 일베충이란 탄압받는 대상이 아니라 되려 탄압하는 존재, 나치 시절이라면 그들은 나치이고 동성애자 문제라면 그들은 아웃팅을 저지르며 동성애자를 탄압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일베충들은 실제로 여성과 전라도민, 진보와 좌파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구사하고 저지르고 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변호하는 것은 일관적이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태도 없는 가식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또한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일베 사이트에서 쓰는 표현과 태도를 실제 현실에서 쓰는 경우는 드뭅니다. 처음 보는 사람, 어른, 직장 등에서 일베식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일베충인 것을 숨기고 다니죠. 즉, 자신도 그것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시에 인터넷에선 일베충인 자신과 현실사회에서의 나를 분리하여 생활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들이 말하는 '가식'이라는 것이죠.



다른 사건은 부산의 K고등학교의 회장 선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회장 선거 등장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 분장'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0899


(전략) K고등학교 관계자는 "해당 이미지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이미지라는 것은 학교와 학생 둘 다 몰랐던 사실"이라며 "분장을 한 학생도 그러한 사실을 몰랐고 현재 굉장히 당황한 상태"라고 위키트리에 입장을 밝혔다. 


또 "지난달 28일 선거 당시 후보자들이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일부 후보는 풍선을 날리기도 했다"며 "이 학생도 적극적으로 나서 튀어보려는 마음에 이러한 분장을 했던 것 같은데 분장이 무엇이 뜻하는 지는 학생과 학교 모두 몰랐다"고 덧붙였다. (후략)



하지만 현실은?


분명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일베에 인증한 주제에 아니라고 발뺌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가식이 아니고 뭡니까? 가장 가식적인 존재는 그들이 가식적이다 욕하는 이들이 아닌 바로 일베와 일베충 본인 스스로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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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니다. 뭐, 실제로 그렇게 돌아간 적은 없는거 같기는 하다만.


하여튼 최근들어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근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못해도 프랑스 혁명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봐요. 인권과 시민, 권리와 의무 등 근대 시민사회의 등장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봐야겠죠. 그 사건은 역사에 큰 획을 그었고, 현대에 굵직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시대를 공부해야 해요. 어떻게 국민들은 정치인과 파시스트들에게 놀아났고, 그것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들은 그 당대와 이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한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고,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너무 파다하게 퍼져있습니다. 이른바, 파시스트들의 광기가 지배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독재시절의 그 모랄리티와 멘탙리티가 잔존하고 있고 심지어 최근에는 그것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일베와 박근혜를 위시한 채 대중은 1930년대 독일의 모습을, 그리고 제국 시절의 일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민주주의의 망령은 이 사회 이 나라 이 국민의 머리속에 그대로 박혀있고, 우리는 그것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만큼은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요소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북한보다도, 핵보다도 더 위험해요. 언제나 국가는 외부의 위협보다 내부의 고름으로 썩어갔고, 망조에 들었습니다. 적은 우리가 가장 강할 때 공격해오지 않아요. 우리가 아프고 휘청거릴 때 오는 법이죠. 외적에게 망했다면, 필시 그 나라는 이미 내부가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고구려가 그랬고, 삼국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조선이 그랬습니다. 역사상 거의 모든 국가가 그랬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그 내부의 위험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해요.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아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나아가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첫 걸음입니다.


부디 우리가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면, 100년전 유럽이 겪었던 그 지옥을 직접 체험하는 것으로 복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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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욕심이 많은 한 노부부가 장에 가서 암컷 거위 한 마리를 사왔는데, 그 다음날 거위가 낳을 알을 보니 놀랍게도 진짜 황금으로 된 알이었고, 그 다음날에도 황금알을, 또 그 다음날에도 황금알을 낳았기 때문에 노부부는 금새 부자가 될 수 있었죠. 그렇지만 욕심이 지나친 노부부였기에 결국 거위의 배를 가르면 더 많은 황금알이 쏟아져 나오겠지 하는 생각을 가졌고, 이내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거위의 뱃 속은 여느 거위와 다를 바 없었고 노부부는 후회했지요. 거위는 이미 죽은 뒤 였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욕심을 너무 부리지 말자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멀쩡히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파괴하지 말자 라는 것에 있습니다.



게임업계의 모습이 딱 그러합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죠. 기실 환경을 파괴하거나 무언가를 직접 소비하여 만든다거나 하는 종류의 산업과는 전혀 다른, 컴퓨터와 약간의 도구들만 있다면 그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 움직여 만든 프로그램, 게임이 수천억원을 벌어 줄 수 있는 창조적인 산업이지요.


블리자드나 EA같은 거대기업은 그러한 산업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실제로 게임 하나 잘 만들어서 초대박을 뽑은 회사들이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서비스되는 게임은 수천억을 넘어 수조원을 벌어다주고 있으니 실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할 수 있죠. 더군다나 꾸준한 발전이 있어야겠지만 자원의 고갈로 인한 산업의 정체, 혹은 소멸을 걱정 할 수도 없지요.(다만 다른 형태의 것으로 전환 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게임업계의 국보법이라 할 수 있는 게임중독법이 하고 있는 역할은 명료하게도 한국에서 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굶겨 죽이는 것이고, 또한 다른 나라 퍼주는 꼴입니다. 이미 이와 비슷한 경우는 역사에서 수차례 있었습니다. 몇가지 예를 뽑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이 폐지되면서 수많은 위그노들이 독일 지방으로 쫓겨나 이주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위그노들 중에서는 부자도 있었고 대포기술자도 있었고 수많은 기술자들도 많았죠. 이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 나라가 바로 프로이센인데, 이 프로이센은 30년 전쟁으로 망신창이가 되어있었으나 이들의 힘을 최대한도로 끌어내어 아주 꿀을 빨았죠. 이 프로이센은 알다시피 후대 유럽의 육군 막강국이 됩니다. 위그노의 이주로 인해 급진적인 기술의 발전이 있었고 이게 곧 국력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례로는 재미있게도 독일의 사례가 있습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독일은 나치에 순응하지 않는 자, 유대인 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탄압했지요. 그덕에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수많은 인력들이 독일을 빠져나가게 됬습니다. 유명한 사람으론 아인슈타인이 있고 이외에도 수많은 기술자, 공학자 등의 지식인들이 이주했습니다.


주로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그 덕에 미국은 전쟁기부터 전후까지 엄청난 자본과 더불어 엄청난 인재풀을 얻고 이상할 정도로 많인 천재들이 미국에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의 물리학, 공학 발달에 큰 이바지를 합니다.



한국의 상황이 딱 이 꼴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게임산업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와중에 세계 클래스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상당히 성장했고 그리고 지금도 성장중인 게임산업을 국가가 나서서 탄압하고 있으니 이미 인식, 지원 등에서 글러먹은 게임업계는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는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죠.


심지어 기존 한국의 게임업계의 업무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해외로 나갈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것이다. 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마당에 지금의 게임중독법은 그 등을 떠밀어 주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숙련된 프로그래머, 그래픽 기술자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그들의 게임산업을 발달시켜주겠죠.


우리는 십수년 뒤 게임중독법이 사라졌다고 해도 이미 수준의 차이를 크게 벌어진 상황이고 그들의 꽁무니를 쫓아 열심히 달려가겠죠. 그리고 과거 한국의 기술자를 대거 포섭했던 나라들은 한국을 멍청한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열심히 키워서 딴 사람 퍼주는 꼴이에요 이건.


심제로 일본의 남코 게임은 우리나라 게임 규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남코 게임이 돈은 잘 벌리는데 프로그래머가 적어서 그쪽에 문제가 좀 있답니다. 이번 법안으로 한국의 A급 프로그래머들이 자기네 쪽으로 넘어 올 수 있으니 일본에서는 쾌재를 부를 소식이죠. 똑같이 중국, 독일도 우리나라의 게임 개발자들을 스카웃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중국 1위 게임업체인 텐센트는 수억의 연봉과 주택 제공을 약속했으며,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지스타에서 세미나까지 열어서 한국 개발자들이 독일에서 게임 개발을 할 경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게임의 가치를 알아 본 자들이 먼저 손을 던져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일인데, 우리는 스스로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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