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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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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10.02
    북한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력이 정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 2018.08.27
    논리의 객관성에 대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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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에 있는 건 맞는데, 그 기반이 증오와 혐오에 있다보니 더더욱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우파로 갈수록 그 경향성이 강해지는데, 그들에게 북한은 말살해야할 적이고, 대화나 타협,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전에 극우보수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을 상실하기에 안 되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는 정치적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결론이라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장된 세뇌와 관계된 내용입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룰에 의해 굴러가고, 전혀 다른 질서와 원칙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서구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같은 잣대를 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북한에도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칙들은 존재하고,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곤 합니다.



북한이 헌법상 국가가 아니더라도, 이미 90년대부터 사실상의,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임을 은연중에, 훗날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북한과 어떤 진전을 이룩하고 싶다면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하고, 마찬가지고 북한에 불만이 있어서 항의하거나 압박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혹은 국가대 국가로 사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압박 카드를 적용해야 하죠.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보여줬듯이, 북한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그들이 한 것은 대화나 협상 따위가 아니라 일방적인 조치들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되려 자해를 입게 만드는 경우조차 있었죠. 



이는 북한을 국가, 정부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북한에게 북한 나름의 주권이 있다고 보질 않는 거죠. 그렇다보니 매우 비정상적인 요구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거의 일방적으로 북한이 굴복하고 우리의 조건, 요구를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러하죠.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발생하는 문제, 특히 한국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그들의 조치나 행동이 그들에겐 상식적인, 자기들의 원리와 원칙에 충실한 행위였음에도 그러한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공분을 일으키거나, 실제 분노할 사안에 대해서도 맥락상 미묘하게 갈리는 입장에서 분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북한 자체에만 적용되는 태도가 아닌, 북한에 대해 판단하거나 표현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이번 유시민의 발언도 그렇고, 가끔 나오기도 하는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좋게 들릴만한, 혹은 욕이나 증오 표현이 아닌 표현들은 죄다 욕을 먹게 됩니다. 북한과 관계되면 객관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죠. 말살해야할 적이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아예 안 되는 겁니다.


유시민의 계몽군주라는 발언이 비판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욕을 먹거나 적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이미 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는 것은 인지부조화이고, 객관성의 상실입니다.


김정은이 북한을 개혁하고 개방까지 보는 듯한 사인들이 드러나며 기존 체제에서 개변을 원한다면 그걸 뭐라 부를까요? 계몽군주라는 표현 자체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님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죠. 왕조 국가라고. 요컨데, 저 표현이 비판을 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런 걸로 열불내는 건 아직도 왕조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6.25 이후, 그리고 독재 정권에 의해 더더욱 조장된 반공정신과 사상이 비판이나 반성,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진리의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이들에게 북한은 몇번씩이나 말했듯, 말살해야할 적입니다. 적이라도 타협이 가능한 종류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대화도, 타협도, 협상도, 거래도, 협력도 불가능한 지워버려야할 안티 그리스도인 셈이죠.



그 갈래는 북한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친북적이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는 혐북이 아닌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극우보수 세력이 진보좌파를 대할 때, 대화나 타협보다는 없애버려야할 적으로 규정한 채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는듯한 모습들을 굉장히 자주 봤습니다. "빨갱이는 죽여도돼."로 대표되는 가치관이죠.



북한이 적인 건 사실입니다. 종전을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게 아니더라도 의심스러운 잠재적 적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객관성을 상실한 뒤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지워놓고 전쟁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버튼만 남겨두고 무한정 대기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운영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북한에 유리하게 들리는 모든 표현에 빨갱이 필터를 씌우고 보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북한이라는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먼저 판단해보고, 남북관계라는 특수성 하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도 같이 판단해봤으면 합니다.


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별세계 관계까진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 상식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부분을 적용 가능한 세계이고요.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발전을 원한다면 북한을 대하기 위해 좀 덜 감정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영역에 서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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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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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은 죽는다.

2.나는 인간이다.

3.나는 죽는다.


논리적 구성의 대표적인 예시인 삼단논법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논리적 사고는 매우 중요하고, 그러한 올바른 사고가 올바른 결론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논리라는 것은 어떻게 시작되고, 구성되어,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어떠한 명제가 있다고 칩시다. 저 위에 있는 인간은 죽는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쳐보죠. 이 한 문장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눈다면 인간/은/ /죽는/다/./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인간, 은, 띄어쓰기, 죽는, 다, 마침표. 더 세부적으로 정의하자면 나눌 수 있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려는 것이니 이렇게 봅시다.


인간은 죽는다. 라는 명제를 따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위에서 세부적으로 나눈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즉, 용어정의죠.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나눈 개념들은 모두 언어로서 정의해야 하고, 정의된 것들이죠. 즉, 기호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기 보단, 그 이상의 고차원적인 개념으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니다.


말했듯, 객관성은 편견에서 자유롭고, 오롯이 존재하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 언어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고, 그 개념의 폭은 너무 넓습니다. 한 문장, 한 단어도 여러 갈래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는 각기 다른 판단과 개념, 사유를 낳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언어적 문장도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다만 더 정확히 쓸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비슷하거나 같은 범주의 사고로 유도되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는 기능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더 낮은 단위로 나눌 수 있는 논리적 구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숫자가 있습니다. 논리학은 논리를 다루지만, 그 중에서도 수리 논리는 더 구체적이고 개념적인 기호를 사용하며 인간적 편견에서 더더욱 멀어질 수 있었죠. 마찬가지로 수학 또한 객관적 지식 그 자체에 가까운 지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실제 논리학, 수학 등이 어떤지는 더 잘 알 사람들이 많겠지만, 요는 한글, 한국어, 영어 등의 언어로서 서술될 수 있는 문장은 인간적 한계와 편견을 담고 있고, 그에 따라 근본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 숫자를 이용하는 논리체계는 그러한 오해가 큰 폭으로 줄어들 수 있죠.


하지만 역시 숫자, 혹은 기호라는 가공된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 공학 쪽으로 가본다면(비단 컴공만은 아니지만, 대표적이라서.) 온갖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가공된 언어들은 사실 비효율적이라고 하죠. 컴퓨터의 기초적인,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적 구성은 0과 1의 2진법입니다. 사실 이는 컴퓨터 공학만이 아니고, 고전역학에서 설명하는 우주 전체가 0과 1로 해체될 수 있겠습니다. 


이 0과 1은 있음과 없음으로 정의되고, 존재로서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적 구성입니다. 약간 곁다리로 나가자면, 그 있음과 없음은 받아들이는 개념이기 때문에 논리적 체계에서 가장 낮아질 수 있는 구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재밌게도, 사실 우리가 보고 받아들이는 세계 자체는 단지 있음 하나 뿐으로 정리됩니다. 우리 주변에 없다. 라고 여길 수 있는 곳에는 사실 있음으로 가득차 있죠. 공기, 빛 등등.


그건 범위를 확장해서 지구나 태양계, 우주 전체로 넓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숫자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온 세상이 1로 가득차 보일 것이고, 우주 밖에서 이 우주룰 쳐다본다면 그저 커다란 하나의 1로 보일지도 모르겠죠. 따라서 없음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실존하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 보이드라는 공간이 있어서 아무 것도 없다곤 하지만, 빛이 지나기 때문에 광자는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공간이라는 물리적 실체는 존재하고, 시간이라는 개념 또한 존재합니다. 단지 빈 공간일 뿐이지,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있습니다.


이 우주 내는 있음(1)로 가득하고 이 우주 밖으로 시야를 돌린다고 해도 단지 알 수 없을 뿐이지 실은 1로 구성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없음(0)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사유일 것이며, 우주 밖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면 그제서야 0과 1은 실존하여 존재하는 게 될 겁니다.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 없음을 채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를 일이죠.



뭐..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논리라는 것은 그러한 언어, 단위, 기호, 개념, 사유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구성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지적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편견이라는 것이죠.


가령 모래사장에 랜덤하게 배치된 돌멩이들이 있다고 칩시다. 우리가 위에서 보면서 돌멩이들을 둘러보니, 어느 한 구석에서 1열로 10개의 돌멩이가 뉘여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에서 패턴을 찾게 되고, 그것을 보고 앞서처럼 1열로 10개의 돌멩이가 있다는 것으로 구성하여 논리적 패턴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돌멩이들을 모아 중앙의 돌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돌을 놓거나, 아예 더 간단하게 두 돌멩이를 서로 양 옆에 두었다고 칩시다. 우리는 이것에서 어떠한 패턴이나 기호를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연찮게 돌멩이들이 10개가 1열로 뉘여져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가 있는 것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돌 두개를 주워서 나란히 둔다고 해서 어떠한 논리적 구성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단지 돌멩이 하나가 있고, 다른 돌멩이 하나가 있을 뿐이죠.


여기엔 어떠한 논리적 구성이 없고, 어떠한 상징도,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돌멩이라는 객체 하나가 있고, 다른 돌멩이라는 객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모양을 보고 어떠한 패턴을 발생시키고 기호화할 수도 있죠. 바로 이게 인간적 편견이라는 거고, 논리적 구성이 인간적 편견에 오염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단위와 개념,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라 하여도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객관성은 허상이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논리와 객관성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은 다음의 두가지입니다.


1.객관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편견에 의해 근본적으로 오류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2.객관적인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후자라면, 우리는 어떤 것이 됐든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안다고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을 뿐이죠. 그저 쓸만한 구성 내에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객관적이라고 여기며 그 작은 틀 내에서 무한히 틀리고 있을 뿐일 겁니다. 이 세계에 필연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우연이며, 객체로서 존재할 뿐 모든 것이 다 허상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문명과 지식이 그러한 논리적 구성 위에 세워졌지만, 그것은 일정 이하의 작은 틀 내에서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 수 있죠. 돌 10개가 1열로 늘어선 것처럼. 그게 어떠한 패턴이나 기호,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똑같은 방식으로 더 많은 열과 더 긴 줄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지 돌 하나가 있고 돌 하나가 있으며 돌 하나가 있는 것에 불과한 것지도 모를 일이죠.



반면 전자일 땐, 모든 지식과 그 지식의 가장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는 논리적 구성이 오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그것을 담보하거나 증명해낼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객관적인 것에 한 없이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죠.


그러한 절대적 객관성을 우리는 진리라 부를 것이고, 우리의 문명, 도구, 삶의 방식 모두가 제각기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추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으며, 단지 한계가 있어 완벽해질 수만은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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