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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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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98건

  1. 2021.08.25
    후진국-개도국의 부정부패와 정치.
  2. 2021.07.13
    극우보수의 핵심 속성 : 무책임.
  3. 2021.07.09
    서울시 확진자 폭증, 오세훈을 당선시킨 대가리가 깨져야할 시민들의 선택.
  4. 2021.07.04
    윤석열은 대통령 하려는 거 아니고 정치하려는 건 더 아닙니다.
  5. 2021.06.25
    내가 더 유능해. 라는 청년들의 망상.
  6. 2021.06.11
    윤리로 휘두르는 정의의 폭력.
  7. 2021.05.23
    문재인이 친중'이어야' 하는 이유. 6
  8. 2021.05.23
    굉장히 성공적인 문재인 친중 프레임 전략
  9. 2021.04.19
    2030이 페미 이슈 때문에 민주당을 안 찍은 이유.
  10. 2021.04.10
    4.07 보궐선거,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
  11. 2021.04.04
    중국이 한국 문화를 공략하는 이유.
  12. 2021.02.03
    한일해저터널의 경제성 문제와 민주당의 멍청한 대응.
  13. 2021.01.26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와 공해 문제.
  14. 2021.01.05
    정경유착이 빚어난 거대한 참사, 바이온트 댐 붕괴사고.
  15. 2020.12.16
    중독은 어디에서 오는가.
  16. 2020.11.13
    지적 자극과 정치사회의 관계.
  17. 2020.11.09
    어째서 현대에 접어들어도 종교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18. 2020.10.23
    함정식 소통 태도.
  19. 2020.10.20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 정의를 독점한 편협한 바보들.
  20. 2020.10.02
    북한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력이 정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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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라고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어왔기에 부정부패는 인간 사회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기능한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롭고 공정하지 못하기에 부정부패는 시대에 따라, 사회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정교해지고, 고도화되면서 배척되기 마련입니다.

 

본디 부정부패라고는 하지만 그게 당연했던 시대도 있었고, 그거 말고는 다른 대안점을 찾지 못하는 집단도 있었으며, 앞서 말했듯, 그 자체로 하나의 원리,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에 있어서 부정부패를 말한다면 결정권자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에게 돈-이권을 찔러주면서 경쟁의 우위를 확보하거나, 또 다른 이권을 배타적으로 차지할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경우지요.

 

서구 사회는 수백 년 동안의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으며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수준으로 진보하였겠지만, 대체로 18-20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손아귀에서 서구적 시스템을 이식당한 비서구권은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생략한 채 지금의 국가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선 이미 오래전 겪어왔던 것을 지금에서야 겪기도 하고, 아직 시작조차 안 한 국가들도 많지요.

 

유럽 등 서구라고 해서 더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더 추악하기도 했고 그들의 시행착오와 갈등을 답습하며 피하거나, 적어도 그 시절 그 수준보다는 좀 더 나은 상태에서 갈등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제도와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여도 더 나쁘게 시작하는 국가도 있지만요.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을 감시하고 감독하고 검증하며, 관리할 수 있는 인력과 시스템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도덕성이 뛰어난 이들로 정부를 구성한다 한들,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합니다. 이는 그들의 도덕성이 남들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라기보단, 할 수 있기 때문에 하게 된 것이라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할 수 있으면 당연히 하게 되죠. 당장은 아니고, 모두가 다 하는 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하게 됩니다. 어떤 당위나 사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근대 이전의 세계는 부정부패를 막거나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했습니다.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고 장부나 서류에 어떤 장난질이 쳐졌는지 검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 장부에 적힌 것과 실물을 확인하기만 해도 되지만 그걸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발하지 못하는 건 전근대 시절에 흔하디 흔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물건도 아닌 사람조차도요.

 

 

그리고 서구식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해도 이러한 시대적 관성은 여전히 작용합니다. 후진국과 개도국에서 부정부패 문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예 국가를 돌리는 시스템 중 하나로 작동하는 이유죠. 가령 필리핀 같은 경우는 부정부패로 경제가 돌아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는 비단 필리핀뿐만이 아닙니다.

 

전근대인이 근대인보다 도덕성이 열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살던 시대에 충실한 인식과 가치관을 가진 것뿐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그들의 세계관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스템에 맞지 않을 뿐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의 국가 시스템보다 후진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당초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시기를 경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적, 현대적 국가 시스템 안에서 그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사례와도 같습니다. 특히 한국이 적절한 예시이기도 합니다. 가장 성공적으로 현대화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고작 100년 전 한국에는 왕이 존재했습니다.(정확히는 111년 전쯤.) 그러나 그 뒤로부터 약 36년 뒤, 민주주의가 도입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거쳐 70~80년대까지 강력한 산업화의 발전을 겪죠. 90년대는 한국이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에서 현대적 국가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던 시기가 됩니다. 밀레니엄이 지나고 2000년대, 명실상부 현대국가에 도착하게 되죠. 거기서 10~20년이 지난 뒤 지금의 모습은 누구도 후진국, 개도국이라 말하지 못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높은 빌딩과 지하철이 깔려 있고, 뛰어난 대중교통 시스템과 전자정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빠르고 효율적인 경험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진국에서 1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성장한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후진적인 부정부패를 겪고 있죠. 물론 이러한 부정부패가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선 발생 빈도가 적을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이것은 100년을 살아가는 각 세대의 세계관이 발전해가는 물질문명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인데, 30년대를 살아가던 이에게 50년대는 다른 세상이고, 6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80년대는 또 다른 세상이며, 8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2000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심지어 200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이후의 세상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살 때 왕이 살던 시대를 겪은 이가 약관의 나이에 을사조약으로 왕을 잃고 80살까지 살았다면 70년도까지 살았을 겁니다. 그가 한창 젊었던 시기와 중, 장년을 겪었을 한국의 모습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전후 세대도 마찬가지일 거고, 산업화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 그들이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세상에서 부정부패란 지금과 달랐을 거고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부정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비교적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것들을 막아왔습니다. 여전히 틈과 허점을 파고들며 더 참신하고 교활한 부정부패를 일삼기도 하고, 감시할 수 없는 공간과 자리라는 현실적 허점에서 결정되는 이야기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부정부패 또한 여전히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은 정말 여러 가지 요인과 원인으로, 그리고 그만큼 강력한 정신적 동기로 발전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심지어 지리적, 지형적인 원인조차 작동할 겁니다.

 

 

대다수의 후진국은 여전히 부정부패가 당연하고 평범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적발하거나 제도를 고칠 생각이 없거나 그럴 수 없고, 심지어 그렇게 해봤자 집행의 의지가 없는 경우도 있고, 감시와 검증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의지가 뒤떨어지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타국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에겐 시간이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야 100년 정도가 걸렸다지만 우리가 특수한 케이스일 뿐, 다른 국가들은 전근대-근대-현대를 거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든 그것을 실행하고 집행하기 위해서 부정부패가 없어야 합니다.

 

기계로 비유하자면 작동에 필요한 부품을 빼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더 많은 부정부패의 손길이 닿는다면 실제 작동해야 할 때 삐걱이며 고장 나거나 그 이상으로 사고가 발생하겠죠.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선 시스템적 정비가 필수적입니다. 지금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가능한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 행정력을 갖추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애당초 부정부패가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봉급이 너무 부족해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시민의 주머니를 약탈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정부패는 반드시 발생할 겁니다. 모든 시스템은 결국 사람에 의해 돌아가고,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되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겁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권자들은 자신의 권한과 권력으로 크고 작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욕심을 실행에 옮겼을 때 거의 반드시 적발되어 처벌되는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동시에 부정부패는 나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선 그것을 방지하고 적발하며 처벌하는 시스템이 그것이 나쁘다고 여겨 행하지 않는 개인의 도덕성보다 강력하고 합리적인 대책이겠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럼에도 개인의 덕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덕성을 다수가 공유하는 세계관으로서 형성된 사회에선 동일한 시스템을 갖추었으나 그러한 세계관이 빈약한 사회보다 부정부패의 발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에서 부정부패가 없진 않았겠지만, 유교적 세계관이 관리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하며 동시대 다른 국가보단 그나마 나은 처지라 여겨지는 것처럼요.

 

 

그렇기에 후진국-개도국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여전히 부정부패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사회의 원리로써 작동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옳지 못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그들의 요구로 하여금 시스템은 부정부패를 배척하는 쪽으로 변화할 겁니다. 한국이 수십 년 동안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것처럼요. 네, 오래 걸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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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보수의 핵심 속성 중 하나를 저는 '무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한국 극우보수 뿐만 아니라 모든 극단주의자, 극단주의 집단에 통용되는 것이지만 한국에선 극우보수만큼 무책임한 집단은 평범한 꼰대들 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번 이준석의 발언도 그렇고, 이들은 굉장히 무책임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터져도 그걸 자기가 책임지고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건을 정치화시켜서 논란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언젠가 했던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정치화 시키면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편 내편의 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게 4대강 사업과 세월호 사건이죠.

4대강 사업은 정치적으로 기능된 논란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과학적, 실리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는 주제였습니다. 물론 정치 세력이 그런 거대한 사업을 한다는데 정치적이게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 사업의 필요성과 효과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4대강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과, 잃는 것을 계량해서 손익비교를 해야하죠. 그래서 4대강을 하는 게 분명하게 이익이 된다면 하는 게 좋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이걸 해야만 하는 숙원인 것처럼 밀어붙혔죠. 온갖 말도 안 되는 논리와 팩트를 편향적으로 제시하는 등..

수많은 비판이 있었고 예상되는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4대강은 대체로 부정적이게 여겨지고 있죠. 실제로 그러니까요. 문제점이 하도 많아서.. 가뭄에도 큰 도움이 안 되고 하천, 강은 유속이 느리고 녹조가 발생하고 등등..

결국 현재에 와서 4대강 빨고 지지하던 이들 대부분 어디갔습니까? 마치 신기루라도 되는 양 죄다 없어졌고 입 다물고 있죠. 4대강 지지하던 이들이 정부와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 좀비였다는 겁니다. 멍청했거나, 순진했거나죠.

그럼에도 4대강을 밀어붙혔습니다. 이외에도 많죠. 사우디 쪽에서도 그렇고.. 10년 동안 꾸준히 밝혀지는 이명박과 그 정권에서 발생한 온갖 괴담은 사실이었고, 몰랐던 사실조차도 새롭게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요.

그들은 국가과 국민들의 발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단 정치화시켜서 반반싸움으로 몰아갔죠. 정당한 비판에도 진보, 좌파, 운동권,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히면서요. 그리고 반반싸움으로 몰고가면 대부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최전선 나팔수인 언론이 국민들을 선동하고, 그들에게 소스를 제공한 게 국정원, 기무사, 경찰, 검찰이었거든요.

수많은 이들을 데리고 댓글알바를 했던 건 이제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고요. 그들은 통치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세상 안에서 영구하게 자기 집단의 사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국가라는 조직 자체를 카르텔들의 수익 실현을 위한 도구로 본 것이죠.

그렇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시키는 헤게모니 장악에만 최대한의 노력을 했던 거고, 민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그건 다 니들 탓이고 니들 잘못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극우보수 맛을 본 이들이 한국식 엘리트주의, 능력주의라면서 패배자와 약자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 비난을 일삼는 거고요.



박근혜 정부는 이 무책임함의 최절정기였습니다. 대통령 본인부터가 무책임했고, 발생하는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무시와 회피로 일관했습니다. 무책임했죠. 무슨 문제가 발생할 때면 대통령은 해외순방이라며 여행을 다니고, 얻는 성과도 없으니 패션이나 보도하고..

세월호 때가 딱 무능과 무책임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는데, 사건이 터질 때 대통령은 없었고, 잘못된 보도와 대처가 이어졌습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모든 행동들이 발생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조치들이 발생합니다.

먼저, 청와대는 자기들이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합니다.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니 사건의 책임은 청와대와 대통령이 아닌 다른 집단이 되어야하죠. 그리고 발빠르게 경찰(해경)과 언론으로 세월호 사건에 논란을 만들어냅니다. 경찰은 증거를 없애거나 조작하는 일을 하고, 언론은 세월호와 희생자들이 아닌 유족들에게 카메라를 겨냥하죠.

아이들과 탑승객들의 안전과 구조 방법, 구조 시행일, 생존 시간과 여러 가능성을 따지고 보도하면서 국민들과 유족들에게 안심이 될만한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보험금인가 보상금 따위를 보도하고 학교에 쳐들어가 책상을 뒤지는 추한 짓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유족들은 종북 빨갱이, 반정부 시위대로 둔갑시켰죠.

왜? 책임의 주체가 정부이고 당연히 유족들은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정부는 책임지면 안 되거든요. 마치 고결해야하는 무오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듯이. 사실 당연한 거죠. 책임을 지면 물러나거나 무언가 손해를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영원불멸한 권력구조를 만들고 자기 카르텔끼리 이익을 봐야 하거든요. 그러니 사소한 것도 책임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전례 자체를 만들기 거부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 판단합니다.

그러니 유족들은 종북 빨갱이로 만들어 국민 절반에게 공격 받게 만드는 거고, 어느 정도 시점에서 지겹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세월호를 꾸준히 끌어봐야 좋을 게 없거든요. 그러니 빠르게 잊혀버리게 만드는 게 최선이니 지겹다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묻어버리려 시도하죠.

그리고 극우좀비들은 그 선동에 그대로 놀아나면서 이제 지겹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상식적으로 세월호 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사건이 되어야 했죠. 근데 그런 정치적 책임을 지기 싫으니 온갖 공작과 선동을 통해 옳고 그름의 싸움, 책임의 싸움이 아닌 니편 내편의 싸움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놀랍게도, 한국에선 그게 가능했습니다. 극우보수 세력에선 그게 가능합니다. 전 솔직히 이 시기 한국 극우보수 국민들은 정치적 판단력이 거세된, 사람보다는 좀비나 도구 정도로 봤을 정도입니다. 상식적인 판단력만 가지고 있어도 무엇이 문제고 누가 문제인지 알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 들어보면 다 어디서 들어본 말들이거든요.

대체로 언론 쪽이었고요. 그냥 언론이 해준 말 그대로 반복하는 겁니다. 문체만 달라질 뿐이지 핵심적인 키워드와 논리만 추출해서 놓으면 다 똑같은 말이었어요. 하나같이. 자기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아니었습니다. 꽤 소름돋더군요. 그래서 현대 정치의 프로파간다와 그것에 영향을 받는 인간 정신 및 가치관의 형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하여간, 여러분들도 국힘당 등 극우보수 세력들의 말과 행동을 잘 지켜보셨으면 합니다. 무책임이라는 키워드로요.

 


한국 핵무장 같은 말도 당장 던지는 말이지 현재 실제로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거 알 겁니다. 그럼에도 던지는 겁니다. 그게 자기 지지자들에게 사이다로 작동할 걸 아니까요. 하지만 그 워딩에 자극을 받을 주변 국가들은? 전혀 신경 안 씁니다. 오히려 적이 생기기 때문에 좋아하겠죠. 적은 지지자들을 하나로 뭉치고 반대하는 집단을 매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니까요. 오랫동안 북한이, 이제는 중국이 대체하게 된 그 역할을요.

브렉시트가 딱 그런 정신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브렉시트를 주장하고 추진했던 영국 정치인들은 브렉시트가 실제로 될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뒤에 해야할 어떤 비전도, 플랜도 없었죠. 그들은 브렉시트라는 워딩을 던지며 반대파를 공격하고 지지자들을 얻었을 뿐입니다. 단지 그게 목적이었죠. 정치적 헤게모니의 확보. 그런데 실제 브렉시트가 통과된 겁니다. 이제 책임져야할 때 였지만, 그들은 책임지길 포기하고 회피했습니다.

그 결과 책임은 그들의 반대파가 져야 했죠. 실제 책임을 지고 피를 보는 건 결국 일을 벌인 놈들이 아니라 그들에 반대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죠.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명박근혜가 9년 동안 싸놓은 똥을 문재인 정권이 겨우겨우 치우고 있다던가..

한국 극우보수는 자기 행위에 매우 무책임합니다.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들은 유능하지도 못하고 무능하면서 부패까지 한 이들입니다. 부정부패하는데에만 유능하고,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권력을 얻는 것에만 유능합니다. 기실, 그것도 지지자들의 수준이 유감스럽게도 낮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죠.

정부가, 권력집단이 책임져야할 일에 책임지지 않으면 그 책임은 응당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대로 쭉 내려와 피해자 본인에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에 낙수효과는 환상이라지만, 책임의 낙수효과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책임자가, 책임기관이 지지 않으면 약자를 제외한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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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취임 석 달만에 대유행…오세훈 방역 시험대
https://m.nocutnews.co.kr/news/558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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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시장되면 제일 먼저 코로나19 현장에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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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후보 "코로나 1년 지났으면 정교한 행정 선보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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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오세훈 "서울시, 코로나 대응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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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형 방역'으로 동네상권 살릴 것…자가키트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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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상생방역 첫 실행…일부 지역 제한 시간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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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4천만원 투입…빛바랜 자가검사키트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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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자치구 "새 거리두기 시행 1주일 연기해 달라"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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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 집회 금지' 해제? 서울시 오락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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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재명 비판한 오세훈에 서울시의장 "시정에 집중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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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확진자 집계 이래 최다…58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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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대중교통 시간 조정·20% 감축 운행…비판도


서울시에서 예산 모자르다, 인력 모자르다. 해놓고 알고보니 오세훈 본인이 TF 해체해놓고 예산 달라고 했던 겁니다. 오세훈 이후부터 서울 쪽에서 추적이 늦어지는 감이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죠.

 

오세훈이 서울에서 이렇게 방역에 발목잡고 망쳐놓으면 경기도나 인천 등 서울 주변지역에서 아무리 열심히 방역하고 조치하고 추적해도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 많은데 막을 수가 없습니다.

 

유흥업소 많은데...강남구청장 "코로나19 역학조사 인력 절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070614223140443 

 

절실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자기네 시장이 팀을 해체해버렸는데. 또 인력 주면 그거 그대로 해체해버리겠죠.

 

오세훈 "젊은층 위해 서울시에 더 많은 백신 배정해달라"
https://news.v.daum.net/v/20210706090313075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젊은층 위해 서울시에 더 많은 백신을 배정해달랍니다. 자기 스스로 방역을 뭉게놓고 정부의 계획 따위는 알바 아니고 당장 내 인기 내 지지율 높히자고 청년층에게 어필하는 거죠.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어차피 젊은층, 청년보수들은 정부의 계획 따위 좆까고 나라 망치고 일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문재앙 정부이라 생각하니 그에 대해 비판하는 오세훈에게 좋은 인상을 가질테니 말입니다. 이미 있는 계획 무시하고 자기 이익 보려는 이기심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정부가 저 말 들어주면 결국 오세훈에게 이익이고 무시해도 정부가 개새끼이고 오세훈이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차피 오세훈도 안 될 거 알면서 하는 말이고요. 돌대가리 선동하려는 가벼운 선동입니다.

 

오세훈 시장, 예방한 美하원 의원들과 한반도 정세 논의
https://news.v.daum.net/v/20210707060045728

 

이게 왜 문제냐면, 중대본이 약 30여 차례 열린 걸로 아는데 오세훈 본인은 딱 2번 참석했습니다. 물론 경기도도 많이 나온 건 아니지만 오세훈만큼은 아닙니다. 서울시 방역은 쇼만 하고 내다 버린 뒤 한반도 정세 논의하러 간다는 거죠. 물론 논의야 할 수 있죠. 근데 안방 일이나 좀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저곳에서 몇번씩 했던 말이긴 하지만, 오세훈이 당선되면 그려질 그림은 너무 뻔했습니다. 그래서 전 오세훈 당선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 '서울시민 대가리가 깨지면 될 일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네, 이제 서울시민 대가리가 깨지면 됩니다. 좋든 싫든 그게 서울 시민들의 선택이었고, 민주주의에서 지도자 잘못 뽑아서 나라가 망하든 지자체가 망하든 결국 그 책임은 누구도 아닌 그 지도자를 선택한 본인들 책임이거든요.

 

효과가 저조한 자가진단키트로 예산 날려먹고, 효과는 효과대로 못 보고, 기존 방역 지침과 조치들 뭉게고, TF팀 없애면서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거리두기 4단계 격상, 1일 감염자 1200명 돌파.

 

이 감염자 폭등과 거리두기 강화가 경제와 활동에 어떤 위축을 가져오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미 1년 넘게 나온 이야기들이니까요.

 

 

 

문 대통령, 12일 '수도권특별방역점검회의' 긴급 소집
http://www.ob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7741

 

결국 대통령이 수도권특별방역점검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당연히 서울시장 오세훈, 요즘은 오로나라고도 불리던데, 그 오세훈 시장도 출석하게 될 겁니다. 그럼 거기서 도대체 어떤 개소리들을 하게될지 기대되더군요.

 

 

 박원순 “S방역이 K방역 성공 이끌어… 지방자치권 확대하면 더 성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5171429798157


박원순이 성범죄 의혹과 자살로 끝을 맺었지만, 그래도 그가 이전에 해왔던 모든 성과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기존 박원순이 해왔던 방역조치들과 현 오세훈의 방역 뭉게기를 비교해보면 참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오세훈이 자가진단키트 도합하기 전 서울시 감염자는 320~370명 정도였습니다.

 

이것도 결국 서울시민들이 대가리 깨져가면서 감당할 일이겠죠.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오세훈 취임 이후 방역완화 조치들이 꾸준히 이어졌는데, 그에 따라 감염자가 폭증했다면 대가리 깨져도 보수질하는 돌대가리들 말대로 문재인, 정부 잘못이 아니라 당연히 오세훈과 그 오세훈을 찍어준 시민들 탓이거든요.

 

말 바꾼 오세훈… 4월엔 방역완화, 지금은 방역강화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1063016238020678
 오세훈표 방역 완화 성급한 것 아닌가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41216010003522
방대본, '오세훈시장 방역완화 제안' 사실상 거부
http://www.km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43
수도권 '거리두기 완화' 없었다... 오세훈 '서울형 거리두기'는 어디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5245
오세훈發 ‘방역 충돌’… 국민은 혼란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0413001005
오세훈, 유흥주점 영업제한 완화 추진...정은경 '난색'
https://www.ytn.co.kr/_ln/0103_202104120201024563
서울 이어 부산도 '금지 완화'…곤혹스런 방역당국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151647_34936.html

 

참고로 부산에서도 확진자가 올라오는 추세인데, 보궐선거로 당선된 국힘당 소속 서울, 부산시장 둘이서 방역을 망쳐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건 객관적인 증거들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이고, 대가리가 안 깨진 이들 말마따라 정부나 방역당국을 욕할 게 아니거든요.

 

펨베 돌대가리 새끼들이야 4월 때 사진 들고와서 자제요청만 한다는 개소리를 해대며 자기들이 똑똑하고 합리적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그런 교화 불가능한 멍청이들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기존 방역 조치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실시하며, 그러면서 확진자가 폭증되는 상황에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 알 겁니다.

 

 

참고로 서울시 방역 사보타주로 나라 경제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서울시 방역 파괴는 서울시 뿐만 아니라, 경기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거죠. 나라 경제는 누가 망친다? 극우보수가 망친다. 나라 안보는 누가 망친다? 극우 보수가 망친다. 과학입니다. 대깨보 새끼들이 뭐라고 하든.

 

 

7월에 접어들면서 코스피 지수가 쭉쭉 떨어지는데, 이건 서울시 확진자 폭증과 4차 대유행, 거리두기 4단계 격상 조치와 관계된 일입니다. 아무래도 대가리가 깨져야할 사람들이 많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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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 전 주로 여기에서 몇번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윤석열은 자기가 총장직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 지 알았을 겁니다. 물론 문재인이 이명박처럼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반항'하거나 '덤벼드는' 놈을 어떻게든 분쇄하고 죽여버리는 인간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이고, 그걸 떠나서 워낙 자기가 한 게 있으니 살아남을 구멍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죠.

본인 스스로도 장모가 됐든 아내가 됐든 물어 뜯길 거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 있다면 그 진실들 대부분 본인도 알았을테니 그냥 총장직 내려놓고 나오면 어떻게 될 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총장직을 내려놓고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실, 간단했죠. 정치에 입문하는 겁니다. 아무리 언론이나 야당 쪽에서(주로 한쪽 계파가) 윤석열을 좋아하고 밀어주고 어천가를 불러준다고 해도 실제 칼자루는 쥔 쪽은 더 이상 총장이 아니게 된 자신이 아니라 정부 여당에 있거든요.

그러니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에 대한 수사를 정치적 보복처럼 만들어야 합니다. 명백한 문제에 대한 정당한 수사조차도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수사를 정치적 수사, 정치적 보복 따위로 포장해서 정치화하는 건 유구한 역사죠.

즉, 본인과 본인 주변의 문제를 공정이나 비리,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야당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국힘당 밑으로요. 국힘당에 들어가면 자신을 보호해줄테니까요. 더불어 이름값 좀 키워서 의원이라도 되면 최고인 거고.

근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단, 자신과 가족의 비위가 드러나게 되면 국힘당이 더 이상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빠르게 꼬리 자르고 모른 척, 아닌 척하면서 손절해버릴 가능성이 생기죠. 윤석열 본인부터가 국힘당에 충성하고 극우보수적 가치관을 극명하게, 꾸준히 드러내며 사상이 검증된 게 아니니까요.

애초에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많지도 않는 걸로 압니다. 아싸에 가깝죠.

게다가 언론은 계속해서 윤석열을 띄워주고 있고 대선을 겨냥한 지지도를 자꾸 비교해주며 심지어 이재명보다 높은 수치마저도 나옵니다. 그러니 국힘당으로 들어가자니 저쪽에서 경계하는 것도 있고, 거기 들어가면 지지율이 뚝 떨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윤석열 지지율은 극우보수 쪽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윤석열 본인이 당을 만들려고 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윤사모가 만든 다함께자유당에 별다른 접촉이나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그마저도 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을 만들어서 이끌 생각은 아직 없다고 봐야겠죠. 지금이라도 당을 만들고 리더쉽과 당 관리 등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하겠지만,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준비한 거 별로 없이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전 대권 도전 선언에서조차 미디어 트레이닝이 전혀 안 되어 있었죠. 심지어 이번 권영세와의 회동에서도 기자를 부담스러워해서 혼자 빠져나가기까지 했죠.

대권 도전 선언문에서도 어떠한 플랜이나 비전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과 비난, 혐오만 줄창 나열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건 거꾸로 말해서, 정치에 장기적으로 몸을 담을 생각까진 없다는 겁니다.

그럼 왜 정치에 몸을 담았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한다면.. 앞서 말했듯,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즉, 생존을 위해서 정치에 몸을 던졌다고 했지만, 정치적 행보의 맥락을 본다면 윤석열은 본인이 대선에서 이길 생각은 전혀 없고,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는 이에게 지지율 몰아주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다음 정권이 민주당, 친문에게 넘어가는 게 아니라면 윤석열과 그 일가에 대한 수사를 멈추거나 뭉갤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유력한 야당 대권주자와 단일화나 지지 선언을 해서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려주면 그에 대한 공으로 본인과 본인 일가 정도 살려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테니까요.

윤석열이 정치를 하는 이유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히 총장직 내려놓고 정치 안 했으면 그대로 오체분시 되어도 이상할 거 없습니다. 그나마 정치를 하니까 당장 건드리기 민감한 어려운 물건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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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안 해본 애들이 흔히 가지는 요상한 망상 내지는 착각이 있다면 내가 나이든 꼰대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 라는 겁니다. 물론 평균적으로 젊은 이들이 윗세대보다 더 유능하긴 할 겁니다. 교육 수준과 경험 수준 자체가 다르고 생각의 유연성 수준 자체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실제 현업에서 뛰다보면 그게 망상일 수밖에 없는 건, 그 젊은이들의 유능함은 신입으로 들어와서 적응하고 일하기 시작하는 시점의 자신과의 비교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능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20대 신입이었던 40대 과장, 50대 부장과 지금 막 신입으로 들어온 20대 신입을 비교하면 당연히 오늘날의 젊은이가 더 유능한 거죠. 근데 이게 위로 올라가면 당연히 배운 적도 없고, 경험도 없고, 경험이 없으니 노하우도, 인맥도 없고 사회생활의 경험치 자체가 떨어지는 애기들이 결코 감당 못한다는 겁니다.

막 요즘 20대 대졸자, 청년들 신입들 유능하다 일 빨리 배운다 그런 말 들으니까 자기들이 진짜 유능한 줄 아는데, 그건 전체적으로 요즘 세대가 빨리 배우고 빨리 적응하고 툴, 컴퓨터 등등 빠르게 익숙해진다는 거지 진짜 일 존나게 잘하는 천재라고 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시키는 거 잘하고 거기서 조금 유도리 잘 챙기는 거 잘하는 게 좋은 건 맞습니다. 근데 그게 내 윗사람들이 좆밥이라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 쉬운 해고, 고용유연화 가능해져서 쉽게 짤리고.. 그런 세상이 오면, 무능한 철밥통 윗세대들 다 짤리고 그 자리 유능하고 젊은 내가 차지할 수 있다는 건 완전 망상입니다. 10년, 20년 구른 베테랑들은 그 기업, 공장의 중심이고 주축입니다. 실제 일이 굴러가는 게 가장 중요한 허리죠.


이런 사람들이 짤린다는 건 그 사람들 없어도 생산성이 나올만한 기술 혁신을 얻어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 몸값과 신입으로 데려올 애들 몸값 비교했을 때 이 사람이 짜르고 싼 값에 계속 로테 돌리면서 골수 뽑아먹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즉, 10년 근속한 베테랑 20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연봉 상승하는 것보다 연봉 2000, 3000 언더 따리 애기들 데려다가 비정규직으로 적당히 굴려먹다 비싸지기 전에 짤라버리고 다른 값싼 쌔삥 데려다 일 시키는 게 더 낫다 이거죠. 그렇게 경력도, 실력도 못 쌓은 채 시간만 버리다 30대 되면 20대 청년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요? 제대로 뭔갈 쌓지도, 어디 뿌리 내리지 못한 청년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나이 먹는 겁니다. 비정규직 부품갈이 인생.

물론 그런 사회에서도 살아남고 잘 먹고 잘 버는 사람들은 있을 겁니다. 근데 그게 나라고 생각하면 안 되요. 왜냐면 본인은 자기 자신감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실제 취업해보면 까이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사실상 1년까지는 거의 계속 배우는 시점이죠.

왜? 신입이니까. 실제 사회생활, 회사 생활은 대학생활이나 동아리 활동 같은 거랑 완전히 다릅니다. 훨씬 귀찮고, 훨씬 좆같죠. 위에서 개지랄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드라마나 라노벨에서나 나오는 사이다 행동은 망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죠.

 
실제 쉬운 해고가 가능해지면 지금 경력 한창 쌓은 이들은 오히려 귀해질 수 있습니다. 검증된 인력이니까요. 반면 20대, 30대 청년들은? 검증이 안 되었고 데이터도 없고 능력도, 경험도 없죠. 그럼 가챠 돌리듯이 좀 괜찮다 싶은 애 걸릴 때까지 계속 해고-고용 반복해도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도대체가, 본인들은 586 윗세대보다 유능해서 실제 업무 들어가면 단박에 에이스, 엘리트 되고 무능하기만 하면서 월급이란 월급은 왕창 받아가는 꼰대들은 죄다 짤라버릴 거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장이랑 친하면 더 친했죠. 적어도 사장과 친한 자기 상사들과는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사회생활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20대 애기들을 더 챙겨주고 기대해주고 밀어주고 할 이유가 없죠.

20대 신입 일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대단한 능력 보여줄만한 기회 자체가 거의 없는데. 직장 생활 시작하자마자 엘리트 코스로 시작하는 거 아니라면 모를까. 근데 그 사람들은 애초에 대부분의 청년들과 어나더 레벨이라 비비지도 못해죠.

그러니 쉬운 해고 고용유연화로 피보는 사람들은 상상 속의 무능한 586이 아니라, 검증된 적도 없고 경력도 없고 언제쯤 일 적응해서 1인분 할지 모르는 20대 신입따리입니다. 그 586이 무능하거나 능력이 부족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검증된 건 맞고 검증되어 산출되는 그 기대분만큼만 해주면 되는 것 뿐이고요. 인간성이 부족할 수는 있습니다. 꼰대일 수도 있죠. 근데 그거랑 일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개꼰대 꼴통이라도 자기 일 존나 잘 하면 그만한 연봉 받아 먹어요. 애초에 엘리트주의라는 게 도덕성보단 능력을 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개꼰대 꼴통이라도 엘리티시즘에 따라 20대 청년 개패고 어린 여자들 치근대도 그 위치에서 자기 능력 펼치게 해줘야 하는 거죠.

물론, 아마 지금 청년들이 지금 586 세대의 나이쯤 되면 지금 586세대들보다 평균적으로 일을 더 잘하긴 할 겁니다. 앞서 말했듯 교육 수준, 경험 수준, 사고 유연성 수준이 다르니까. 근데 그쯤 되면 그들이 애기라고 여길 20대 애들이 그 나이 먹은 자기들 보는 시각이 지금 청년들이 586 보는 시각이랑 비슷할 겁니다.


애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죠, 무능한 윗대가리, 유능하고 똑똑한 청년. 만화에나 나오는 그런 클리셰죠. 근데 그런 건 자기 수준에서나 통하는 거고, 실제 그 윗자리 어린 애들이 바로 올라가면 감당 절대 못합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일하는 인맥조차 없는데. 솔직히 청년들이 욕하는 그 윗대가리가 정확히 어떤 업무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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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아니었겠냐만, 최근 들어 극단주의가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극단주의의 종류인데, 어떤 사상이고 가치관이고를 떠나서 파시즘적 극단주의화가 눈에 띕니다.

 

조국 사태나 윤미향, 심지어 최근의 박지성 논란을 보면 하나같이 정치적 문제라기 보단 차라리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가까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고,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들이 위선이니 뭐니 하는 걸 떠나서 그들을 비판하고 욕하는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정치, 사회적 논란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건사고에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하는 이들인데, 이들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상대가 잘못했다면 그건 악이고, 그걸 비판하는 나는 정의이며, 그 정의의 기준은 윤리이되, 내가 휘두르는 폭력은 또 다른 악이 아니라 정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쁜 놈에게 휘두르는 절제 없는 폭력은 정의로운 비판이자 정당한 처벌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비판의 대상이 될만한 논란을 가진 이들을 비판하는 거 자체는 이상할 게 아니고 때로는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이들에겐 한가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바로 나는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이라는 전제죠. 그렇다보니 상대방의 논란이 완전히 밝혀지기도 전에 일단 악인으로 낙인찍고, 정의로운 본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처벌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걸 가지고 있습니다.

 

불의나 잘못된 것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비판을 하거나 평가, 판단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적 윤리, 도덕의 기준을 재확인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각입니다.

 

근데 이들은 그 선을 훌쩍 지나쳐버리는 게 문제라는 거죠. 마치 사회에 속해있으면 안 될만한 악, 혹은 적, 또는 적그리스도 따위로 설정하면서 그들을 몰아내고 척결하며 말소시켜버리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듯 할 정도로 극렬하고 증오와 혐오를 절제 없이 드러냅니다.

 

그렇게 드러낸 감정일수록 본인 스스로는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문제는, 그들이 아무나 잡고 그 지랄을 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때로는 정말 잘못된 것에 그러한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윤리적 기준을 두고 폭력을 휘두르는 거고, 그 폭력을 정의롭다고 생각한다는 게 진짜 문제라는 거죠.

 

당사자에겐 마땅히 받아야할 처벌이라고 생각하면서요.

 

 

더 우스운 건 그들에게서 어떠한 철학이 없거나 윤리적 기준점이 모호하여 기준이 들쭉날쭉하다는 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준은 있는데,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이 느끼는 말초적 감정입니다. 정확히는 분노. 이거죠. 자기가 얼마나 분노하느냐에 따라 받아야할 처벌의 강도가 달라지고 얼마나 사악한지가 결정됩니다.

 

딱 파시스트들이 지들 꼴리는데로 모여다니며 몽둥이 휘두르며 정당성 없는 제재를 일삼는 것처럼요. 스스로를 정의이자 질서라 생각하며. 사회의 적과 싸우는 고결한 투사를 연기하며.

 

 

그러다보면 이들은 점점 자신들의 "역할"에 빠져들어버립니다. 마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지면서요. 일베, 메갈 투사들처럼 스스로 어떤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어떤 철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부적으로 형성되는 감정적 분위기 내지는 어떠한 선동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방향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좀비들이죠. 실제론 스스로의 판단은 전혀 없고, 스스로도 언어화시키지 못하는 인상과 엉성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무엇은 옳고 무엇은 나쁘다. 라는 식의 단순한 세계관만 있을 뿐이거든요.

 

그런 이유로 사안에 따라서도 폭력의 강도가 달라지고, 심지어 똑같은 문제라고 해도 그 사건 당사자에 따라서 아예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무시되기 일수이며, 마찬가지로 똑같은 종류의 사건임에도 사안마다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어떤 일관적인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형성되는 인상이 중요한 거고, 그 인상에 따라서 개별 사건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실상 사회적 이익을 발생시키는 게 전혀 없고, 오히려 귀만 어지럽히기 마련이며, 때로는.. 아니, 꽤 자주 그들 스스로 논란을 만들어내기 마련인데, 스스로를 정의롭다 여기니 외부의 비판을 적의 공격으로만 여길 뿐이지요. 또한 정의로운 활동이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니 그러한 사건사고에 열심히 자신의 감정을 배설해냅니다. 그 감정적 배설을 정의의 증명이자 당사자가 받아야만하는 마땅한 처벌로 생각하죠. 그리고 지나친 공격에 상대가 고꾸라지면 정의의 증명이라며 환호합니다.

 

 

정말로, 최근들어 어떠한 사건사고가 터지면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욕먹을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라기보단 지독할 정도로 고결한 윤리적 기준을 적용시키며 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악인이고, 심지어 그러한 악인을 만들고 싶어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왜냐? 악인이어야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정의라는 정당성이 생기고, 그러한 무절제한 폭력은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윤리 기준을 만들거나,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두들겨 패며 즐기고 싶은데 정의롭고는 싶은 이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시키고, 과대해석하며 과몰입하면서 두들겨 패죽여도 무방한 악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죠.

 

요즘 발생하는 논란과 사건 사고를 대하는 걸 보면 그런 경향성들이 보이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윤리 기준이 점점 모호해지고 지리멸렬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반대로 보자면 전통적 윤리기준들이 해체되고, 의심 받고, 비판 받으며, 다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싶더군요. 일베, 메갈 등 극단주의적 정치병자,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무너뜨려 자신의 패악질을 정당한 자유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의 분탕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변화하는 과정에 끼어들어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도 같은 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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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문재인을 어떻게 친중으로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왜 친중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일단, 미중갈등에 있어서 한국은 미국의 편에, 중국은 현재적, 그리고 잠재적 적국 내지는 갈등국에 가까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친미적 입장에 서는 것은 국익에 합치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극우보수에게 친미는 생존과 관계된 일이니만큼 정의로워야하고, 애국적이기까지 한 행동이 됩니다.

반대로 친중이라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고 국익에 저해되는 행동이며, 중국 "공산당"이기에 사상적으로 친북의 다른 형태로 위험하며, 불순하고, 사악한 것이 됩니다.


극우보수의 세계관은 단순합니다. 선-악, 강자-약자, 위선-NO가식. 대부분의 대중들이 그러하듯 이해하기 쉽게 한 줄로 쓰인 선동문구가 더 잘 먹히고, 간단한 논리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이건 극우보수일수록 그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그들이 반대 진영에 비해 좀 더 보편적인 극단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극단주의적일수록 관점은 더 좁아지고 논리는 일차원적으로 구성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극우보수는 중도에 가까운 우파, 보수보다는 극단에 더 가까운 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거나, 그들의 목소리와 영향력이 반대 진영에 비해 훨씬 더 강한 편이기 때문에 단순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은 편이라 봅니다.


따라서 문재인은 잘한 면도 있고 못한 면도 있기보단, 그냥 죄다 못한 사악한 친중 빨갱이가 되는 겁니다.


최근 몇년 동안 종북이나 그것을 암시하는 말 듣기 어려워진 거 느끼실 겁니다. 기껏해야 남북정상회담, 고위급 회담, 판문점 선언 등 정권 초 잠깐 나오긴 했지만 문재인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라면 종북보다는 친중이 더 쉽고 빠르게 연상될 겁니다. 그건 국제질서를 읽은 극우보수 진영의 큰 그림을 그린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거나, 혹은 언론과 정치권이 감각적으로 유리한 공격 명분과 프레임을 자생적으로 형성시킨 것일 겁니다.

왜냐면 문재인 정부들어서 종북, 친북 빨갱이는 거의 수명이 다해가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년 전 북한이 무너지거나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이 불가능하게 되면 중국 공산당과의 마찰 및 갈등을 부각시키거나 외교적으로는 몰라도 국내에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한 적 있습니다. 한 4년인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을 겁니다. 체감상 한 7년은 되는 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군요..

어찌됐든, 딱 그런 형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정부이기 때문에 함부로 타국에 대해 함부로 발언할 수 없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이미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등으로 개트롤을 했다보니 좋든 싫든 국익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걸 일본에서 니 잘못 펀치를 한방 날리면서 관계가 크게 악화된 거지,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정말 큰 변화 없이 한일관계는 유지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근데 지금 상황에서 야당에선 친중이네 뭐네 하면서 너무나도 자유롭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사상적 공격을 하고 있죠. 서로 반대 상황이었다면 국힘당은 국익이나 외교를 운운하며 오히려 비판하는 민주당을 지적했을 겁니다.

지금 친중 공격은 국힘당을 비롯한 극우보수 세력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공격인 겁니다. 종북 빨갱이는 이제 너무 구시대적이고 약빨도 떨어졌죠. 북한이 포를 잘 안 쏴주니까요. 그러니 중국 쪽으로 포문을 돌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겨냥해서 욕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과 비판은 종북몰이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단어 몇개가 바뀐 것 뿐이고, 시대적 변화를 감안해서 좀 더 무리하지 않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 뿐이죠. 물론 이것도 맛탱이 간 애들은 진짜 선 넘는 날조와 왜곡을 서슴치 않습니다만.


이전 글에서 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애당초 문재인 친중 타령은 그들의 믿음의 발로이고 그래야 한다는 내제적 당위의 표상이지 실제 문재인이 친중으로 보일만한 껀덕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반문, 반정부, 극우보수 세력에서 욕을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없으니까 만들어내서 욕하는 거죠. 그리고 이유가 생겼으니 욕하는 자기가 정의인 거고, 욕하는 대상은 몰아내야할 적, 성전의 대상이 되는 악마로 취급되는 거고요.


극우보수 세력에게 문재인은, 기실 문재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진보, 좌파 세력은 몰아내야할 것입니다. 문재인은 그들의 대마왕인 셈이고요. 문재인 정부는 무너뜨리고 몰아내야할 마왕성이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사상적으로 숭고하고 순수한 성전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고, 진보좌파 세력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모두 몰아내서 정치적으로(어쩌면 물리적으로...) 절멸시켜야 하는 악성 종양 내지는 악의 토양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주구여야만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은 친중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거대 담론인 국제질서 논리는 개인의 삶이나 사정의 이해관계에서 크게 벗어난 분야이고, 사업가나 주식쟁이라 하더라도 국제외교보다는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들(최저임금, 노동법, 금융 관련 법안 및 규제 등)이 많다보니 친중이라는 프레임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관계의 부담없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이거든요.

과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는 말은 극우보수의 세계관에서 노무현이 대한민국의 모든 악을 만들고 유지하는 악의 상징이어야 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고, 지금 문재인 정부 하에서 극우보수가 내뱉는 거의 모든 비판과 비난은 그 기저에 문재인 때문이다, 문재인이 문제다. 를 깔고 있는 거고요.

그런 이유로 문재인 친중 타령은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선 문재인이 친중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확립시켜야 하기에 나오는 말들인 셈이죠. 문재인은 친중이다. 라고 말하지만 실은 문재인은 친중이어야 한다. 는 겁니다. 공격을 위한 내제적 당위. 믿음의 발로.

그리고 그래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문재인이 나름 일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판할 점들은 있죠. 검찰 개혁, 인사, 특히 부동산.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부각되기 전까지 문재인 정부는 지지율 70%를 몇년간 끌어오면 공룡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일 잘하고 비판할 점을 찾기 어려웠죠.

그래서 언론과 야당은 없는 잘못을 만들어내야 했고, 그 대표적이고 가장 기본 전제가 되는 게 바로 문재인 친중론입니다.


더 추한 것은, 극우보수의 극단주의적 면모와 덜 떨어진 지성이 결합해서 나온 천박하기 짝이 없는 온갖 모욕들인데,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들은 정의고, 그들이 공격하는 문재인과 문재인 정부, 민주당, 진보좌파는 악의 세력이기 때문에 어떠한 가책도 없이 공격해도 된다는 겁니다. 근데 또 그렇게 공격하면 재밌어요. 너무 재밌습니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쾌감, 강자가 된 듯한 우월감,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사명감. 이런 것들에 뽕이 빠져 있는 거죠.

박근혜가 탄핵 당하자 마치 나라가, 민주주의가 망한 것처럼 울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박근혜란 정의의 상징이 무너지고, 악의 세력에게 나라가 함락 당한 것처럼 보인 겁니다. 자기들끼리만 정의인 듯한 착각. 독선이라고 하죠.


문재인이 친중이어야 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일을 잘하니 없는 잘못 만들어서 공격해야 하고, 정의의 포지션에서 싸워야하니 적으로 만들어야 했던 거죠. 전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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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전승절 친중 딜레마의 해결법

아시다시피 친중이라는 비판을 받아야할 것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 시절의 전승절 참여였죠.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는 능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겁니다. 자유 진영에서도 이름값, 전략적 중요성이 크나큰 한국이 중국의 전승절에 참여하는 게 다른 자유진영의 시각이 어떻게 비칠지.

 

박근혜의 이 어처구니 없는 외교력 덕분에 미국은 한국의 포지션과 속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사드를 강요함으로서 한국을 시험했습니다. 어차피 사드는 들어가야할 물건이지만, 이걸 강경히 압박하면서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에 참여할 것이냐, 친중적 판단을 내릴 것이냐를 선택하게 만들었고, 당연히 미국과의 동맹을 던질 수 없는 한국 입장에선 중국을 자극하게 될 것이 뻔한, 그렇기 때문에 좋든 싫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존속됨을 천명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이 이상한 짓을 하니까 너, 우리편인 걸 증명해라. 하게 만든 겁니다. 그리고 이건 반쯤 외통수이기 때문에(한국이 미국 손을 놓을 수가 있나요?) 무조건 결과는 정해진 일이었죠. 중요 동맹에게도 증명을 요구하는 미국의 과감한 외교력이기도 하고요.

 

결국 한국은 사드를 들여오면서 중국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반대로 어차피 들여오게 될 사드를 불필요한 논란과 함께 들여오며 미국에게 얻은 건 없이 정치적, 외교적 손해만 보게 됩니다. 정석대로라면 중국을 덜 자극하면서 원만하게 천천히 들여올 수 있는 물건이었거든요.

 

 

이에 대한 극우보수 세력에선 이 사건을 이제 어떻게 기억하냐면, 이혁재의 더 발언처럼 시진핑의 왼쪽에 설 수 있는 대통령이 누가 있느냐고 기억합니다. 네, 자뻑이죠. 솔직히 전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봅니다. 근데 이거랑 비슷한 사고관이 또 어디에 있었냐면, 한국 극우보수의 사상적, 정신적 뿌리인 일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80년대 도시바 스캔들인데, 군비경쟁하던 미국과 소련은 잠수함 전력은 미국이 훨씬 우위에 있었습니다. 왜냐면 다축 CNC를 기반으로 한 기술적 우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죠. 잠수함 뒤쪽에 있는 프로펠러, 스크류를 훨씬 정밀하게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소음이 소련 잠수함보다 훨씬 적었고 속도도 훨씬 빨랐습니다.

 

근데 일본 도시바에서 중요 전략물자, 당연히 미국이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다축 CNC를 노르웨이 업체를 통해서 소련에 장비는 물론 소프트웨어까지 홀라당 팔아먹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미국은 소련의 스크류가 갑자기 성능이 좋아졌다는 걸 알아냈고, 그 원인을 찾아보니 일본 도시바였다.. 그 때문에 미국이 열받았고 일본에서도 난리가 있었다.. 이런 건데.

 

왜 이것과 박근혜의 전승절 참여가 비슷하냐면, 당시 일본 쪽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강대강으로 살벌하게 경쟁하고 있으니까 자유주의 진영의 네임밸류 있는 일본이 소련과 적절하게 괜찮은 관계를 지니면 미소 양쪽에서 이익을 받아먹을 수도 있고, 소련이 일본의 발언을 좀 더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중재자 역할을 맡으며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거나 최소한 중간자로 이익을 볼 수 있다.. 이런 계산이었을 거란 거거든요.

 

아마 박근혜는 정말 이혁재의 생각과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박근혜 본인이 내렸을지,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판단을 내려줬는진 모르겠지만, 진짜. 정말로. 박근혜가 시진핑의 옆에 서는 모습을 원했을 거라는 심증이 꽤 강하게 듭니다. 자유주의 진영 중 누구도 시진핑의 옆에 서질 못했으니, 이거 꽤 그림이 나올 거고 미국과 중국의 분쟁 및 대립에 있어서도 전승절에 참여한 한국을 중국이 존중할 것이니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로 중요한 외교적/국제적 위치를 담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뭐, 사실이야 어쨌든 굉장한 외교적 오판이었고 한국의 국익과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 실책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문재인이 실제로 친중 정책을 펼쳤는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런 적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문재인 친중 정책이 뭐가 있느냐 하면 정말로 뚜렷한 게 없습니다. 진짜로요.

 

반면 문재인 정부가 친중으로 욕을 먹는 이유를 찾아보자면 문재인 본인의 중국몽 발언이 특히나 대표적인데, 이건 원문을 찾아본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진짜로요. 

 

https://www.yna.co.kr/view/AKR20171215067000001

 

[전문] 문재인 대통령 베이징대 연설 전문 | 연합뉴스

(베이징=연합뉴스) 노효동 이상헌 기자 =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중국 베이징대를 찾아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

www.yna.co.kr

 

https://cafe.daum.net/Europa/3Q5x/106188

 

Daum 카페

 

cafe.daum.net

 

근데 정작 중국몽 발언의 전문을 확인해보면 일베를 비롯한 극우보수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맥락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중국의 독재를 세련되게 비판하는 의미로 읽어야 맞습니다.

 

이외에도 미세먼지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 때문이 아니라고 발언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게 친중 정책인 건 아닙니다. 미세먼지 대책과 노력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고요. 까놓고 말해서 이 미세먼지 문제는 박근혜 정부 때도 안 했습니다. 그게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중국 동부 해안 공장지대에 융단폭격 날릴 거 아니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극우보수든 진보좌파든 중국 정부가 말을 한다고 듣는 놈들이 아니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할 겁니다. 미세먼지 어떻게 해보라고 해서 중국이 귓등으로도 들을 것 같은지요?

 

 

자, 그럼 왜 문재인이 친중이 되었느냐 하면...

 

그냥 그런 파편적 인상을 특정 세력에서 부풀리고 지속적으로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아래 자료를 봐주세요.

 

 

문재인이 친중이라는 전제와 믿음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잘못된 반응.

 

이것 이외에도 여러 선동 사례들이 있습니다. 다양하죠. 정권초부터 끈질기게 시도해왔던 한미동맹 위기설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방미 때도 햄버거 안 줬다고 푸대접이라도 된 것처럼 굴던 조선일보라든가...

 

아무튼, 위 자료를 보고서 확신하게 된 건, 이런 프레임을 정권 초, 혹은 그 이전부터 그려왔고 의도해온 세력 내지는 전략적 합의가 보였다는 점입니다.

 

위 댓글들에서 나오는 반응은 문재인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친중파여야만 나올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재인이 실제 친중 정책을 했거나 친중적인 포지션을 보였던 점은 없다는 점이죠. 뭐 시노팜을 들여온 것도 아니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동의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정책적, 외교적 액션을 취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확고하게 문재인이 친중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이든이 중공군 막아 훈장 받은 영웅을 세운 건 한국과 미국이 반중, 대중국 포위망에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사실상 쿼드에 가입한 건 아니더라도 한국이 미국의 입장과 같이 하겠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거거든요. 만약 문재인이 친중이었다면 저기서 꽤 당혹스럽게 받아들이고 거부까진 아니더라도 깔끔하게 웃는 낯을 할 수는 없어야 맞습니다. 외교에서 표정 또한 하나의 메시지로 해석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타국 외교정상과 맞이하는 시진핑의 웃음이라든가. 아베와 악수할 때만 시원찮다는 표정이었죠.)

 

 

따라서 문재인과 문재인 정부가 친중으로 평가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꾸준히 문재인과 문재인 정부를 친중, 친중정책, 친중 정부라고 단정짓고, 은유하고, 허수아비를 비판하고 왜곡하며 공격했습니다. 문재인의 친중 발언이다 라는 것들도 찾아보면 앞서의 중국몽 발언처럼 왜곡되어 공격하는데 사용되었지요.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095 

 

‘운명공동체’ 발언은 어쩌다 ‘친중 증거’가 됐을까 - 미디어오늘

코로나19 확산이 ‘친중 정책’의 결과라고 공격하는 언론사들은 그 핵심 근거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과 중국 관계를 두고 “운명공동체”라고 말했음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담은

www.mediatoday.co.kr

 

그리고 사람들은 언론의 말에, 언론이 형성한 분위기와 프레임이 그대로 낚인 거죠. 까놓고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팩트체크하지 않거든요. 그럼 눈과 귀를 장악하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죠. 이번 미사일 제한 해제와 같은 국익 및 안보에 직결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도 보도를 안 하려는 쪽으로 나오고 조선일보처럼 햄버거 대접 못 받았다는 식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마치 햄버거 따위가 중요한 외교적 대접인 것처럼요.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 성과 발표 당시 다음 뉴스란. 종편에선 속보 하나 없이 건강 프로 진행.

 

마찬가지로 종편에서도 문재인의 방미 업적을 보도 안 하고 건강프로나 방영했다고 하죠. 아마 문재인 방미보다 스가 미일정상 관련 보도를 더 많이 했을 겁니다.

 

수년 동안 한미동맹이 악화되었거나 위험하다, 흔들린다고 했지만 코로나 때도 미군 장성이 나서서 그런 거 없다고 그런 식의 보도에 불편함을 표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는 전혀 아닌데 말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정말로 문재인이 친중이고, 친중 정책을 펴는 친중 정부이기 때문에 한미관계가 안 좋아졌다고 믿습니다.

 

바로 언론의 양적인 선동 물량공세가 있었기 때문이죠.

 

 

대부분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는 뉴스만 보고, 보이는 기사만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일단 양적으로 이슈를 선점해놓으면 선동하기가 굉장히 편해지죠.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의 물량공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조국 당시의 100만 기사, 다른 의견에서조차 족히 수십만, 적어도 10만 이상(...)인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짠가?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이런 전략을 짰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언론사나 극우보수 진영 내에서 자체적으로 형성된 어거지 비판이 양적인 목소리에 힘입어 프레임화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문재인이 친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른바 만들어진 친중 악마인 셈입니다.

 

애당초 문재인 친중 타령은 그들의 믿음의 발로이고 그래야 한다는 내제적 당위의 표상이지 실제 문재인이 친중으로 보일만한 껀덕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반문, 반정부, 극우보수 세력에서 욕을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없으니까 만들어내서 욕하는 거죠. 그리고 이유가 생겼으니 욕하는 자기가 정의인 거고, 욕하는 대상은 몰아내야할 적, 성전의 대상이 되는 악마로 취급되는 거고요.

극우보수 세력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중도세력도 이 프레임 선동에 넘어가서 진짜 문재인이 반미친중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젠 저쪽 진영에선 확고한 진실, 상수가 되어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믿고 싶어서 그렇게 믿은 거지만, 그들의 믿음이니 어쩌겠습니까.

 

돌대가리라고 욕을 해도 애초에 전제 자체가 다르다보니 그 전제를 부숴야 하는데, 그러려면 4년 넘게 쌓아온 문재인 친중이라는 관점의 근거과 믿음을 싸그리 날려야 하는데, 언젠가 역사화되거나 관심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한 당장 그럴 리가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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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과 반응.

 

현 2030 세대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공정과 평등입니다. 물론 그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태도를 취하느냐와는 별개로, 그러한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건 사실이라 봅니다.

 

현 청년 세대는 윗 장년 세대와는 다르게 차별을 거의 겪지 않았거나 비슷한 차별을 비슷하게 받아왔습니다. 여자들이 어렸을 때 받은 차별만큼 남자들은 비슷한 차별을 그 나이대에 당해왔죠. 따라서 두 성별의 차별을 없애자에는 동의하지만, 여자들의 차별만 없애자거나 남성의 차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건 그 자체로 불평등한 겁니다.

 

근데 여시, 워마드, 메갈이 등장하면서 페미가 발흥하고 남성혐오와 역차별이 가속화되었죠. 이미 이 두 성별의 갈등은 통제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둘 다 메갈과 일베로 위시되는 혐오로 맛탱이가 가버렸거든요. 일베나 메갈이 아닌 사람? 물론 많죠. 그런 사람? 있을 수밖에요.

 

 

정부여당의 페미 정책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인데, 장년층 세대의 공감대와 감성으로 접근하니까 자신들의 부채의식을 반발이나 반론 없는, 다시 말해 별 생각 없이 수용해주면서 무조건적인 수용과 인정적 태도를 취한 겁니다. 우리가 그 동안 특혜를 봤으니 그만큼 내놓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현 시대의 세태와 구조적 공정성보단 일단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쪽에 무게추를 쏟아주는 것으로. 그러다보니 현 세대 2030들에겐 정부여당이 청년 남자들을 버렸다. 우린 버림 받았다. 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습니다.

 

위 경찰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을 보면, "왜"냐고 물어본 것 뿐인데 오히려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라면 엄밀히 따져 공정한 건 아니더라도 쌤쌤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런 건 이유가 없잖아요. 그 누구도 왜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혜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몰아내자, 입다물게 만들자는 태도죠. 무조건적인 특정 집단의 이득과 특혜입니다. 그러니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존나게 불평등하다. 왜 나만, 남자들만 개고생이지? 그렇다고 뭔가 얻는 게 있나? 보상이 있나? 없어요.

 

그래놓고 뉴스를 보면 허구언날 여성 어쩌고 남성이 어쩌고 그러고 있습니다. 여성에겐 호의적인데, 남자들에겐 잠재적 가해자라고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얌전히 특혜만 받고 입 다물고 있으면 적어도 직전 시대까지는 뭐라고 안 하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불편하지만 굳이 건드리진 않는 그런 거. 때때로 작은 것이라도 뭐라도 베풀면서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공정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그냥 묵묵히 하기도 합니다. 근데 지금 시대엔 페미니 뭐니 하면서 오히려 남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이 가만히 있다면 그건 병신인 거죠. 길들여진 가축인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라고 안 하는데, 아예 건드리기까지 하니 갈등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거죠. 뻔뻔하고 찌질한 여성들에 대해 남성의 여성혐오가 발생하거나 최소한 불평등함이 있다, 남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라는 인지가 나타나는 구간이 되죠.

 

 

이번 보궐선거에서 남자들 표가 오세훈에게 모인 건 민주당이 청년 남성들에게 가증스러워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이유들 때문에요. 남자들도 힘들고 고생하고 오히려 지금까지 남성에게 불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아가리 싹 다 쳐 다물고 있으면서 여자들에겐 왜이렇게 호의적이고 양보해주고 우리의 것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는가? 심지어 무고죄와 유죄추정으로 구체적인 생존의 위협마저도 받아가면서?

 

 

물론 이 모든 게 민주당과 정부의 책임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미당과 페미 대통령을 표방한 이상, 그리고 여성 정책을 펴나간 이상 모든 어그로가 정부여당에게 끌릴 수밖에 없죠. 이미 민주당은 페미당이고 문재인 정부는 페미 정부라는 인상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2030들의 그러한 인상이 표심으로 나타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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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선 이미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리 일 잘하고 객관적으로 상대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가 좋지 않으면 그냥 욕 먹는 거죠. 그리고 그게 선거 때 표심으로 갈리는 거고.


민주당은 그 이미지를 착실히 망쳐왔습니다. 정권 초기의 말도 안 되는 지지율과 나름 괜찮았던 쇼맨쉽, 이미지 빌드업은 좋았습니다. 심지어 조국조차도 키크고 잘생긴 수석이라고 문재인과 같이 있는 사진에 미남들이라며 여초에서도 칭찬하고 그랬죠.

근데 그걸 야당의 발목잡기로 아무 것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무능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고, 이후로 공정, 평등이라는 기치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조국 정국이 가장 핵심적으로 치명적이었죠. 만들어진 불공정 프레임과 검찰의 사보타주로 이미지를 박살을 내고 공정, 평등이라는 가치를 무너뜨립니다.

페미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사명 비슷한 걸 수도 있다고는 봅니다. 다만 문제는 페미 중에 제대로된 사람이 없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절대다수인데다 그런 이들의 패악질이 일베보다 더 한 경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덜 한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죠. 더 추악해요.

근데 그런 페미에 편승하면서 10~30대 남성들의 감정을 확실히 건드려버렸습니다. 청년층 지지율이 박살난 건 솔직히 말해서 감정 문제입니다. 극혐하는 페미에 편승한 정권에 페미 정책과 페미적 발언을 하는 민주당이 곱게 보이지 않는 거죠. 심지어 이건 민주당 연성 지지자이지만 나름 꾸준히 지지하던 이들도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 문제입니다.

진보좌파 쪽이 페미니즘을 안 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을 감안해도 민주당의 실책입니다. 젊은층을 포함해서 남성들의 심리적 반발과 페미 진영 자체의 혐성을 감지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어야 했어요. 친페미 발언 하나로도 중국몽처럼 꾸준히 물어 뜯길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데 말입니다.
  

거기에 부동산 문제는 정말 큰 실책인데 이거야 뭐 더 말할 필요는 없으니 굳이 짚지 않는다해도 민주당은 이미지 관리와 여러 정치적 선택에서 실패한 겁니다. 특히 감정 문제를 건드렸으니 실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쪽과 비교해서 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죠.

대중들에게 정치인과 정당에서 자기들끼리 벌이는 부정부패와 비리보다 자기들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과 행동, 정책에 더 큰 마이너스를 줍니다. 전자는 걍 걔네가 더러운 놈들이지만 후자는 내 감정을 건드리는 거니까요. 그러니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미쳤고 법과 윤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전자가 더 배제되어야할 이들이라고 해도 실제 표심은 후자에 더 불리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여당 인사보다 야당 인사가, 그리고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크게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더 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비판은 민주당이 더 많이 받았죠. 이건 민주당이 남들보다 더 가혹하고 엄격한 잣대를 받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경기장에서 싸운다는 걸 감안해도 민주당의 이미지 작업과 지지자들 감정 고려에 실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 봐요.

자기들끼리 묵묵히 자기 일 잘하면 남들이 알아봐줄 줄 아는 건 굉장히 순진한 거죠. 거의 구시대적 신화에 가까운. 민주당은 그 정도로 안일하게 손 놓고 있었던 겁니다. 전부터 꾸준히 말하는 거지만 꼴같잖게 고고한 도덕군자 이미지 깨부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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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중국은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 내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이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완전히 배척되는 집단이고, 거의 세상에서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집단이니만큼 대중참여적인 민주주의에 대해선 거의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이상의 피를 봐야 한다'며 잔혹하게 짓밟아버리고 민주주의 태동의 씨앗을 거세했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요. 사상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사상이 겉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면 나름 성공적이죠.

그래서 그 이후로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겪으며 이러한 일이 다시금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에 따라 애국주의를 심으며 국가와 중공을 동일시하게끔하여 애국을 한다는 건 곧 중공에 충성하는 것으로 유도했습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 90년대 이후 중국에선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하고, 중국이 유의미하게 강한 국력을 가지게 되는 2010년대부터 이들의 영향력은 강성해지는 국가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성은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고, 제어하고 싶다고 제어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중국 정부는 때때로 자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등떠밀릴 수도 있습니다. 가령 중국 정부가 (무력을 동원한) 외부적 영향력 확대를 꺼리거나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싶지만 대중들의 자만심에 의한 내부적 요구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액션에 나서는 경우가 그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중국 정부가 그러한 민족주의를 통제하거나 제어에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고, 오히려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민족주의를 충동질 하는 건 쉬워도 제동을 거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이죠.


2.
북한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체제입니다. 그저 최대한 버티고만 있을 뿐이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체제의 한계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10년 이상은 더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한 10년쯤 지나고 무너진다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북한은 의외로 생존에 최적화된 체제이기도 하거든요. 애당초 생존이 목적이라.

반대로 말하자면 북한은 결국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고, 그렇게 실질적 행정력과 영향력이 상실된 무주공산을 누가 먹느냐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당연히' 북한의 모든 영역이 자동적으로 한국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그리 현실적인 전망은 아닙니다.

역사적/민족적 당위성이야 당연히 한국이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십년간의 유의미한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걸 따져야 한다기보단, 그걸 따지려 드는 세력이 있을 겁니다.

가령 중국같은.

무엇보다 그런 걸 떠나서 혈맹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북중관계를 위시로 북한 북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려고 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습니다.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가능하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북한 영토 전부를. 곤란해진다면 조금씩 양보하면서 내어주기만 해도 200%, 아니. 600, 800%는 이익이죠. 이에 대해서도 예전에 자주 이야기했던 것 같네요. 중국 입장에서 북한이라는 완충지와 미국의 국력과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트러블 메이커는 필수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는 것도 중국에겐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될 거고요. 그래서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통일해도 육로, 만주를 통한 직접 교류 경로는 꽤 오랫동안 닫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중국은 북한 붕괴시 해당 지역을 직접적으로 점령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것이고, 그게 불가능하거나 곤란하다면 친중 괴뢰정부를 만들고 중국 공산당의 명령과 결재로 돌아가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명목상의 북한 정부를 한반도 북부에 설립하고 완충지로 만드는 것이 차선일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충분히 가능성 있고 실제 실행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북한 수뇌부 일부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인재 몇을 가지고 북부에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 국권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하며 군사적으로 보호해주는 것은 타국의 시선과 비난 및 반발과 별개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니가요.

하지만 전자는? 명분이 너무 부족하죠. 그건 그냥 불법 점령이고 정복이니까. 하지만 중국 공산당 속내에는 너무 달콤한 선택지이자 '차후의 계획'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단순히 동맹이니 어쩌니 하는 명분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필요한데, 그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자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거죠.


3.
그게 가능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20년, 30년전부터 동북공정을 시행해온 나라가 중국입니다. 동북공정의 가장 근본적인 명분이 되는 것은 중국 역사 및 문화와의 동질성이나 유사성 따위가 아니라 '현재 중국이라는 국가 내에 조선족이라고 하는 한민족의 일파가 소수민족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거든요.

다시 말해서,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중국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라면, 조선족 또한 중국 역사와 문화의 일부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조선족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족과도 겹치는 민족도 많은데 어째서 한국에 대해서만 이렇게 강력하게 우기느냐고 말입니다.

그건 중국 정부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이유는 이미 앞서 말했고요. 북한을 점령할만한 역사적, 문화적 당위성의 확보. 나중에 조선족과 북한을 엮어서 북한에 대한 진공 명분을 확보하는 것. 이건 이미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가져가기 위해 사용했고 성공한 명분이기도 합니다. 유로마이단 사건 등으로 위험해진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계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

북한이라는 지역을 차지하면서 확고한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 일부 고위직을 중공 내의 고위직으로 임명하기도 할 거고요. 추후 이북 지역에 중국의 지방정부를 세우는 걸 당면한 목표로 세울 겁니다.


4.
그렇다면 그게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단순히 우기기만을 해선 안 됩니다. 일단 적절한 근거와 논리를 세워야 하고, 그게 객관적으로 인정 받게끔 해야하죠. 물론 극도로 어렵고 기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겁니다. 통할 가능성도 낮고 지금도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를 진행하는 이유는 그게 필요한 일이고, 그들이 북한 정부의 붕괴 시점을 언제로 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어디선 10~15년 내로 본다고는 합니다만..) 적어도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할 때까지만 통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미 꿀꺽한 것을 다시 뱉어내라고 하는 건 애초에 먹히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죠. 그래도 중국의 욕심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공정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공정의 핵심은 최소한 중국 내에서 한국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일부 내지는 카피로 결론을 내려놓는 일이고, 애국주의 교육을 통해 길러낸 민족주의자들, 중국=중공에 충성하는 애국청년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로 하여금 공정에 힘을 싣는 지지와 추진력을 만들고 그들 스스로도 공정을 진실로 만들어내는 거죠.

중국인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의 것을 배낀 것이라 믿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겁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충동을 부추기도 있을 거고요.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중국이 문혁으로 자기네 문화를 조져놨거나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탐나고 샘나서 빼앗고 싶어하는 열등감의 표출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게 주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중국이 한국을 타겟으로 사고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면 한국이 아니라 '한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한민족의 역사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를요.

조선시대 때는 남한과 북한이 없었잖아요? 그러니 한국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원은 남북한이 없던 시대의 것이니 어그로가 한국에 끌렸을 뿐이지 중국 공산당이 목적한 지점까지 도달하는 충분한 성과를 얻었을 때 군사력으로 북한 지역을 먹고자 한다면 역사적, 문화적 명분을 확보한 중국에게 지금까지 점령한 지역 싹 다 뱉고 꺼지라고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한국이 아무리 떠들고 미국이 힘 좀 쓴다고 해도 말이죠. 알박고 좆까라고 하면 뭐.. 중국 입장에선 일부 지역을 내주거나 일부 북한 고위 인사를 던져주고 이 이상은 양보 못하겠소! 하겠죠. 중국이 다 내놓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땅을 가지고 협상하게 되는 형세가 되는 거죠.


5.
그럼 그게 진짜 가능한 것인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하면..

솔직히 좀 어려울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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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정치의 기술 중 하나가 불리한 의제는 묻고 유리한 의제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유리한 의제가 어렵다면 논란이 많은 의제를 가져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덕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한일해저터널이라는 의제로 논란을 키워 불리한 정세를 흐리게 만든 김종인의 술수는 꽤 괜찮았지요.

 

어째서 굳이 한일해저터널이라는 주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아예 경부선 지하화가 낫지 않겠냐는 말까지 꺼낼 정도인데, 아마 다른 모든 의제보다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간함 주제였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반격도 예상하기 쉽고 1차원적이라 대응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고요. 당장 민주당은 한일해저터널에 친일 딱지를 붙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전 문제라고 봅니다. 한일해저터널은 기본적으로 경제성이 안 나는 무의미한 사업입니다. 심지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경제성이 약하고 무엇보다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습니다. 수십 조, 많게는 100조까지도 추산할 정도인데, 그 정도 돈이면 차라리 국민 전부에게 1억씩 뿌리는 게 더 낫죠.

 

 

간단하게 몇가지만 지적하자면, 부산항은 세계 5위 항구입니다. 대한민국 경제력이 세계 순위권에 들고 무역대국으로 치자면 경제력보다 더 높은 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다시 말해 부산항이 일개 포구가 아니라는 점이고, 과거 100년 전처럼 일본에 쌀이나 옮기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규모만큼이나 물류의 집중도는 좁은 국토에서 더욱 효율적이게 됩니다. 부산항에서 대체로 처리해버릴 수 있다는 거니까요. 위치도 좋고, 물류에 있어서도 효율적입니다.

 

공사비가 수십 조 원이면 통행료도 결코 싸지 않을 겁니다. 물류는 터널로 옮기는 것보다 배로 옮기는 게 더 싸고 효율적일 겁니다. 가까운 곳이라면 속도가 빠르다는 점 정도나 이익일까요. 근데, 특히 대륙 물류와 연결되기 어려운 지리적 상황(북한의 존재) 때문에 한국에 물류를 육로로 옮겨봐야 큰 의미는 없죠. 일본 철도가 신칸센 같은 걸 빼면 협궤로 이루어져 호환이 안 되고 옮길 수 있는 양과 속도도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무의미하죠.

 

설령 북한에 철도 깔리고 중국, 시베리아, 유럽까지 쭉쭉 이었다고 해봐야 안전한 경로가 아닙니다. 날씨, 치안 등등. 중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야 말할 거 없고, 시베리아의 날씨는 더더욱 말썽이라 고려해야 하는 게 많아집니다. 그런 걸 떠나서 유럽이든 중동이든 육로 수송보단 해양 수송을 선호합니다. 더 싸고 빠르거든요. 중간에 여러 나라 거치면서 통행료 내고 싶진 않을 겁니다. 그냥 배로 직송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아까 포구 이야기도 있었는데, 전우용 역사학자 말처럼 포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물량만 처리하는 작은 항구입니다. 그래서 다리 놓이면 역할이 없어지며 사라지거나 쇠퇴하죠. 하지만 부산항이 작은 항구인가요? 부산에서 나가는 화물은 일본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한국 수출품이 가는 모든 곳, 심지어 외국 상품들끼리 환적해서 나가는 항입니다. 일본행 화물 빼도 세계 10위 안에 드는 무역대국의 수출입 물량을 받는 항구라는 거죠.

 

결론적으로 경제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겁니다. 들어가는 공사비에 비해. 일본으로 빠지는 물량을 빼도 일거리 자체는 많다는 겁니다. 게다가 일본 쪽 수출은 무역갈등과 함께 줄었다는 점도요. 다만 코로나 19와 함께 이러한 현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인천항 쪽에서 동남아 쪽 신규항로 물동량 증가와 함께 부산항 물동량이 좀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한일해저터널을 통해 일본 쪽 물류가 빠지겠지만 한일 양쪽에게 그다지 경제적이진 못할 겁니다.



이런 문제점들이 있는 게 한일해저터널의 경제성과 목적성 문제입니다. 근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일해저터널에 대한 반대 논리가 어떻죠? 민주당에선 친일로 몰고 있고, 전우용 학자 말대로 한국에 몰리는 경제성이 일본으로 빠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거기에 동의할 수 없겠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대응은 친일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 기실 국힘당과 그 지지자들 입장에서 친일 비판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이 인정하지 않든 아니든 오랫동안 들어왔던 거고, 거기서 더 새로울 게 없을 지경일 겁니다.

 

심지어 진짜 친일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사항에서도 입을 다물고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으면 했지 인정하거나 그게 지지 철회, 혹은 표를 안 주는 상황까지 가지도 않죠. 지지자들조차 국힘당 욕해도 결국 투표장 가면 국힘당 찍을 사람들이라 친일 비판은 지겹다거나 그 비판을 사실이라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진짜 사실이라 짜증난다 정도의 인상을 줘도 표가 빠질 가능성은 낮습니다. 빠져도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거죠.

 

 

전 아예 민주당이 이에 대해 별 다른 반응이 없길 바랬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의제로 넘어가지 말고 가덕도 의제를 길게 끌고가서 국힘당을 분열시키고 국힘당 지지자들, 특히 부산 쪽 사람들의 지지층 이탈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설령 이 떡밥을 물어도 가덕도를 꾸준히 계속 어거지로라도 끌고가면서 국힘당의 민감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물었더군요. 그것도 굉장히 1차원적인 수준의 이해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국힘당 친일 비판은 유효할 지는 몰라도, 국힘당 지지자들에게 친일 비판은 무의미합니다. 이게 그들의 친일적 행위나 사상에 대한 무감각함, 더 나아가 그들의 (인정하지 않는) 친일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비판이라는 겁니다.

 

물론 민주당도 저걸 제대로 각잡고 물기는 부담스러웠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식으로 포퓰리즘적인 의제라고 비판할 수는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당의 대응이 멍청한 거죠.

 

민주당이 헤게모니 정치를 못하는 게 이런 면 때문이죠. 지금 국힘당 쪽에선 뭐라고 하고 있죠? 한일해저터널 떡밥을 이용해 민주당의 친일 비판을 이끌어내고, 공론화가 필요하다면서 의제를 빼어온 뒤, 반일 감정에 편승하면 안 된다면서 오히려 민주당의 반일사상이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의제를 가덕도에서 한일해저터널, 친일과 반일 논란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원전게이트라는 시덥잖은 선동질을 하면서 정권을 공격하고 있고요.

 

최근 성범죄 프레임 선동 지령이 유출되었는데, 민주당과 청와대는 가덕도 떡밥으로 국힘당을 부산 시민과 분열시키고 원전 게이트라는 장난질을 성범죄 프레임 선동 지령 건으로 받아치며 아젠다 경쟁을 했어야 했습니다. 근데 아무 것도 못하고 있죠. 정치 못하는 놈들답게요.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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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그의 자유론은 효용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주장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는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인류 발전을 이끌 원동력으로 개개인의 개성을 꼽았습니다. 또한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규정했지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는 것이며, 사회나 정부는 그러한 개인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고 개입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영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간접적인 영향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언어가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지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것은 전자의 자유가 후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본 것입니다.


밀이 개성을 중요시 여긴 것은, 그것이 인간 정신의 건전한 토론과 토론의 다양성을 통해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국가는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아무리 좋고 옳은 것을 목표로 한다 하여도 독선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부작용과 역작용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개인과 사회,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게 될 것이라 하죠.


반면 개성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요소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개성이 극대화될 때 개인과 사회는 그런 부작용을 제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와 사회 또한 결국 개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요.



밀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와 그것을 건전히 유지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들은 일견 이상적이기도 합니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일테지만 여전히 대중은 자신의 자유를 통해 사회적 해악을 발생시키고, 개성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그러한 해로운 주장과 목소리가 사그라들거나 나쁜 것으로 규정되어 힘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악종에 열광하고 환호하며,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실질적인 힘을 갖추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목소리는 자유가 주어졌기에 나오는 것이 아닌,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갖춘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세대와 직종, 지역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집단이 공유하는 것은 그만한 경쟁력, 혹은 (아무리 어설프고 황당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만큼은)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상이 먼저고, 그 사상을 표현할 자유가 있기에 그러한 존재를 확인하고, 확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 도덕은 남을 통해 확인하고 충돌하며 수정되면서 그 시대, 그 환경에서의 적절한 선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이 따라가는 것이 아닌 윤리와 도덕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악한들의 모임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건전한 집단에 비해 매우 낮거나, 혹은 매우 색다를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해악적인 함의를 담는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거나, 우위에 설 때 도덕과 윤리의 기준도 그에 맞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밀은 이러한 안 좋게 나아가는 사회는 자유로운 토론과 개성을 통해 혁파되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맞기를 바라고요. 대체로 안 좋은 것들은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사라지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더 나은 것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더 나은 논리와 주장을 통해 비판하고, 제시했기 때문이고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해악스러운 악종들이 있고, 그것들은 여러 지점에서 다양한 피해를 입힙니다. 문제는 그것이 피해인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그것을 나쁘지 않다, 문제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일베, 워마드, 최근의 ㅇㅅㅇ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의 행동과 언어는 반사회적이고 일반 윤리와 도덕, 심지어 인권의 영역까지도 건드리는 민감하고 위험천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밀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간접적인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서구사회에선 한국처럼 명예훼손, 모욕죄에 대해 인정이 훨씬 까다롭거나, 아예 그러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완전한 날조와 거짓선동조차 자유로써 보호 받는 미국 같은 곳에선 정말 이게 같은 인간의 지성을 공유하는 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지적 실패작들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지요.



그러나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것입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답과 타협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행동이지만 의외로 그러한 결과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죠. 특히 사람이 많아질 수록, 그 토론자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록, 때때로(혹은 대체로;) 토론자의 지성이 부족할수록..


일베충이나 환빠와 같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들이 어느 곳에서 완전한 논파를 당하거나 상당한 반격으로 자신의 주장과 논리에 힘을 잃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죠.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 등 여러 정신적 기제들이 상처받은 자아를 복구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회피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무익한 토론과 논쟁을 만들어내고, 아무런 이익도 효용도 없는 활동을 발생시키죠. 그러한 활동은 매우 피곤스럽기 때문에 한두 번 하는 정도로도 힘들고 귀찮아집니다. 공연히 바뀌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러다니거나, 토론으로 쫓아내기보다는 차라리 권위나 권한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내쫓아버리거나 혹은 그 본인이 최대한 무시하기도 하고, 아예 그 장소를 떠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건전한 현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건전하지 않은 것은 해악적 행위를 반복하는 당사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은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읊으며 용인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상 그 반대에 선 이들에겐 하나의 공해(Polution)에 불과합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PC방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나 게임 속에서조차 그 내용의 해악성 때문에 듣기 싫은 소리를 강제로 반복해서 듣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집에 있는데 밖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지속해서 들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음공해라고 합니다. 원하지 않는 해로운 성분이 공기나 물에 섞여서 건강을 해친다면 그 또한 환경오염, 공해라고 할 것입니다.


정신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토론으로 교정되지 않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 또한 그러한 부정한 표현에 대해 좋진 않게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또한 하나의 개성으로 토론을 통해 부딪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좁고 짧은 세계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항구적인 발전보다 당장의 평온함을 선호하고, 토론과 같은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을 즐기기보단 그런 경험은 때때로, 그리고 남이 하는 것을 보는 걸 더 좋아하죠. 우리는 밀처럼 관용적이고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명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베, 페미와 같은 정치병자들의 주장과 표현들이 공해라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할까요? 밀의 유지를 따라 직접적인 영향,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용인하고 최대한 토론을 통해 부딪히며 교정될 것을 희망해야할까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힘들고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때때로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아니, 이미 그 자체로 그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밀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사회적 해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일상적인 공해를 다루는 방식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는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이며 개성을 짓밟는 것이기도 하죠.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과 거리가 멀며 반사회적인 사상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언제고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의 짓밟음은 감정적인 쾌감을 줄 수 있고 깔끔함에 청량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한 폭력적 방식은 그 자체로 해악일 수 있습니다.


악을 짓밟은 우리가 또 다른 해악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옳아 보이는 것에도 독선적 요소가 있어 발전을 저해한다는 밀의 주장처럼요.


사상이 환경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우 어렵고 더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한지, 그것에 반발하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난제들이 우릴 괴롭힐 겁니다. 또한 개개인이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고요.


단지 극소수의 머저리들이 자기들끼리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무시해줘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대중을 이룰 정도로 거대한 사상의 공유는 무시할 수 없겠지요.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을 기반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렇게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할 대화와 토론, 그 토론을 풍성하게 해줄 수많은 개성을 생각하면 지리할 정도로 아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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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서 바라본 바이온트 댐. STOP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바이온트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베니스보다 국경에 더 가까운 산간 지역이기도 하죠. 역사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던 지역에 포함된 곳이었고, 1866년 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우디네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동쪽 지역은 오헝 제국에 넘어갔다, 다시 1차대전 때 이곳 전체가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오스트리아의 땅이었는데 아틸라아가 가져온 곳이 되는 거죠. 뭐, 이탈리아 왕국은 망했지만.

 

 

<딱 봐도 댐으로 만들기 좋은 지형.. 하지만 댐은 물을 막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보시다시피 높은 암석산이며 그 협곡이 좁고 길어서 군사적인 관점에선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골에는 피아베 강의 지류가 흐르는 강이 있죠.

 

모든 문제는 이러한 딱 봤을 때 댐을 만들어먹기 좋은 지형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사업가 주세페 볼피는 이 지역에서 돈 냄새는 맡은 거죠. 그는 자신의 사업체인 SAFE라는 전력 회사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공업지대에 전력을 공급하여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주세페는 전기, 철도, 수도 같은 기간산업으로 큰 성과를 올린 사람이니만큼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사업 자체는 1920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도 터지고 하는 통에 일이 잘 안 풀렸고, 그에 따라 본격적인 공사는 56년에 베네치아 북쪽 100km 쯤 떨어진 바이온트 협곡을 막는 건설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리고 약 3년 후, 59년도에 완공하여, 높이 262m, 두께 27m, 담수량 1억 5000만 톤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대규모 댐이었죠.

 

 

 

<딱봐도 뭔가 쏟아진 흔적이 역력한 바이온트 댐의 풍경...>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컸습니다. 먼저, 건설 전 조사 과정에서부터 학자들에 의해 논쟁이 발생했는데, 이곳의 지형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기반암이 계곡 양쪽에서 경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향사구조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층에는 점토층을 포함하는 곳인지라, 물에 매우 약한 지반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 물이 많이 모이면 지층이 물러져 산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과학자들과 언론인들은 SADE에 경고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사업에서 발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부정부패한 국가와 기업이라면 더더욱이죠.

 

오히려 SADE는 그들의 경고를 무시했고, 언론과 정부와 함께 사업 방해를 막으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물은 불보다 많은 인간을 죽였다.>

 

 

먼저 이탈리아 정부는 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언론인, 마을 주민, 반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부터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체제전복을 획책하는 내란 음모 내지는 파르티잔으로 몰아버립니다. 소송까지 벌일 정도로요. 마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여기에 어디서 더 많이 본 것 같은 짓을 하나 더 합니다. 어용 학자를 동원하거나 학자적 판단보단 정치적, 경제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펼치기보단, 계곡에서 그러한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거나 설령 난다 하더라도 그 규모는 위협적인 수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하죠.

 

 

당연히 시민단체들과 주민들은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고, 상식적으로도 석회암 지형은 물에 약하다는 건 공교육을 제대로 배웠다면 알 겁니다. 석회석은 물에 녹는다는 건 어렸을 때 과학 교과서만 제대로 봤어도 머리 어딘가엔 남아 있을 지식이죠. 그러니 댐 건설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정경유착은 그들의 저항 따위는 이도 안 들어갈 정도로 훨씬 공고합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앞서 말했듯 반대자들은 지역 주민들을 포함해 파르티잔, 빨갱이가 되었죠. 참으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아무래도 반도국가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긴 한 모양입니다.

 

 

 

 

<참사의 결과가 어떨지 너무나도 뻔하게 보이는 지도.>

 

 

결국 댐은 완공, 60년 2월부터 담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다음달 3월엔 수위가 130m, 이후 170m까지 올랐는데, 이 시점에서 당연하게도 경고되어왔던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죠. 댐 주변 지층에 물이 차면서 석회암 지층으로 이루어진 산이 기울어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 주변 지층의 움직임은 하루 3.5cm 정도의 이동이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2km의 거대한 절리가 댐 쪽으로 발생했고요.

 

그리고 60년도 11월 4일, 기어코 산사태가 발생해 토사 70만㎡가 쏟아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바이온트 댐 측에선 더 큰 일이 벌어질 까 그저 댐 수위를 135m까지 낮추는 정도로만 대처를 해버리죠. 덕분에 지층의 이동은 하루 1mm 정도로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에 통하다보니, 안전불감증인지 인지부조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욕심과 고집 때문에 SADE는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돌립니다. 댐 사용을 중지하거나 타당성 검사를 다시 하거나, 지속적인 경고를 인정하기 보단 수위를 낮추니 괜찮아지니 적당히 높이를 조절해가며 전기를 생산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현장에서 사면의 이동 속도를 봐가면서 수위를 다시 높이기 시작했는데, 약 1여년 동안 185m, 235m, 다시 185m로 조잘하며 산의 흙이 얼마나 움직이지는 확인했지만 경계한 것과는 다르게 지층의 이동은 생각보다 빨라지지 않았죠. 그래서 62년 11월엔 수위를 235m까지 올려 버립니다.

 

당연하지만 이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이는 관찰 동안 간헐적으로 소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인부들은 산사태를 무서워하거나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모여서 산사태를 구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에겐 별로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참사의 전조였고, 욕심에 눈이 먼 이들은 그 신호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댐의 수위가 240m를 넘자 흙의 이동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1m씩 움직일 정도에 이르러 댐 관리 기술자들은 댐의 수위를 240m까지 낮추기로 결정하죠.

 

 

<그나마 코믹한 짤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끔찍한 참사였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SADE와 정부가 아닌 반대하던 지역 주민들이었죠.>

 

 

1963년 10월 9일 오후 10시 39분,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바이온트 댐이 범함한 것이죠. 단 6분이었습니다. 이 댐에서 발생한 사태가 바로 아래, 롱가로네 마을을 집어삼키기까지 말입니다.

 

먼저 댐의 상부 남쪽에 있는 토크 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댐에 의해 형성된 인공호수로 2억 3800㎡의 토사가 덮쳤죠. 그리고 그 충격으로 호수의 물은 협곡의 북쪽 사면으로 쏠렸고, 높이 250m나 되는 거대한 메가 쓰나미가 발생해버렸습니다. 파도는 댐을 부순 게 아니라, 넘어서 쏟아졌고 협곡을 타며 6분간 흘러 앞서 사진에 보이는 롱가로네 마을을 비롯하여 리발타, 피라고, 빌라노바, 파에 등의 인근 마을을 쓸어버렸습니다. 이 쓰나미는 1.5km를 더 가고도 70m나 되는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가까이 있고 정면에 있는 롱가로네 마을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죠. 마을 자체가 쓸려나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요.

 

 

<당시 참사의 그래픽 이미지. 롱가로네 마을이 있는 곳이 완전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추정 사망자는 약 1900~2500명이며, 이 중 절반이 롱가로네 마을 주민들이었습니다. 피해자 중 350여 가구는 가족 전원 사망이라는 끔찍한 결과였죠. 주민 추산으로는 총 5000명까지도 추산된다고 합니다.

 

 

<사고 이후의 사진.>

 

 

그렇다면 이 참사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 책임자들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것이 맞겠지만, 아시다시피 이탈리아의 부정부패는 이 거대한 참사조차 묻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최소 계획자였던 주세페는 이미 늙어 죽었고, SADE와 정부의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부는 이 사고는 인재가 아닌 천재, 신이 하신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죠. 그게 억울할 정도로 과한 책임이라곤 해도 말입니다. 사고발생 후의 재판과정에서 책임을 져야한 고위직, 임원진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SADE와 관련 회사들의 기술자, 실무자 몇 명만이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재판과정에서 공개된 설계자 까를로 세멘짜가 동료에서 썼던 편지를 보면 "그 힘든 공사를 우리는 용케도 아주 운 좋게 멋지게 해냈네. 그러나 내 능력을 벗어난, 나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그 뭔가가 거대한 것에 여전히 대책없이 노출된 상태임은 나는 느낀다네.."라고 적었습니다.

 

댐 설계자부터가 이러한 사업에 위기감과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공사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법정에 회부된 기술자들 중 마리오 판치니는 법정 진술 전날 자살, 몇 명은 재판이 끝나지 전에 사망하며, 진짜 책임을 져야할 고위관계자들은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실제 책임과 처벌이라는 독박은 실무진들이 죄다 뒤집어썼죠.

 

 

 

<오, 인간이여.>

 

 

결국 이 사건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힌 정경유착 비리와 잘못된 토건사업이 빚은 참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책과 영화 등으로 소개되고 분석되었지요.

 

이후 이 지역은 02년 동안 접근 금지구역이었다가 풀렸고, 08년에 유네스코는 인류 역사상 기억해야할 사고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의외일진 몰라도 댐 자체는 별 피해가 없었습니다. 물들이 넘어가며 댐 상부에 손상을 입혔지만, 댐 자체는 그대로 서서 남았죠. 댐 붕괴사고라곤 하지만, 실제로 댐이 붕괴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제 물을 담진 않습니다만..

 

이 사건 이후 이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경적을 울리지 않고, 라디오를 끄며 대화를 중단하거나, 잠시 내려 추모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근처에 사고를 추모하는 작은 성당이 건축되기도 했죠.

 

 

정경유착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생하는 범죄이기도 합니다. 토건과 얽히는 것은 거의 한국의 전통에 가까울 정도로 흔했고요.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묻어버리는 기업과 그것을 묵인하는 정부, 학자적 양심보단 정치경제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학자, 정부의 의도대로 사건을 정치화하여 반대자를 공격하는 언론, 주민과 단체, 학자들의 경고와 반대를 찍어누르고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 등..

 

정의와 어긋난 일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일이기 때문에만 비판받고 비난에 시달리는 게 아닌, 어떻게든 크고 작은 실질적 피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위해 그러한 정의를 묵인하고 묵살한다면 언젠간 이익으로 덮을 수 없는 대참사가 발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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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에서 옵니다. 모든 것이 적당히 풍족하며 그러한 풍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대체로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건전하게 살기 때문이고, 그러한 건전한 삶이 건전한 정신을 대변합니다.


도박이나 게임, 마약, 음란물 등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어딘가 매우 결핍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돈에 의해 유지되는 생활기반인 경우가 많죠.


가령 청소년의 게임중독을 살펴보면 아무 문제 없는 가정과 학교생활에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가정에 충실하면 되고, 학교생활에 문제가 없다면 친구들이랑 평범하게 놀면 되는 거죠. 가정환경이 불우하고 왕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관계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하거나 건전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결핍은 그 반대급부를 발생시키는 거죠. 배가 고프면 식욕이라는 욕구가 발생하고, 재미가 부족하면 자극을 찾듯이요.


인간관계가 결핍된 경우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추구하게 됩니다. 다만 이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인간관계의 결핍 또한 여러 유형과 상황이 있기 때문에 이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공통된, 통합된 설명이 가능한 부분들은 있습니다. 가령 왕따를 당하는 청소년의 경우 게임으로도 빠질 수 있고, 커뮤니티에도 빠질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 클랜이나 길드 따위로도 어느 정도 충족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력과 성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남들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끝없이 과잉 소통하고 댓글이나 답글, 리트윗 등을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피드백을 하는 등 소통에 대한 결핍된 욕구를 토해냅니다.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많은 소통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강박적인 반응 확인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지적에 매우 적대적이고 방어적인 태도 또한 현실에선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죠.


현실에서 부족한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을 게임, 커뮤니티의 대체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간접적이다보니,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중독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소통과 관계가 더 쉽고 빠르다보니 그곳에 더 쉽게 빠져들고, 현실의 인간관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거죠.


이는 주변인들에게 무시 당하고 멸시 당하는 반대급부가 그러한 인정욕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메슬로의 자꾸 늘어나는 욕구 계층 피라미드에도 소속 및 애정 욕구 위로 인정 욕구가 있죠. 


<원래 5계층으로 시작했다.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끝없이.. 분열하는.. 옥수수처럼..!!>



따라서 게임이나 커뮤니티 중독에 빠져있는 경우 대체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는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서 나름 네임드이거나 네임드를 추구하는 활발한 활동성을 보이고 있을 것이고요. 다만 건전한 정신을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집단의 수준은 그 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거나 불건전한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 접어들면 현실보단 가상에 더 큰 무게를 두게 됩니다. 현실보다 가상의 친구들이 더 소중한 거고, 그곳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한 일이며, 하루라도, 몇 시간조차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삶의 루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깬다는 건, 더구나 그러한 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로선 쉽게 견디기 어려운 금단 증상일 것이고요.


현실에서 아무리 한심하고 찌질하며 무가치한 존재라도 인터넷의 가상 세상에선 자길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과의 소통을 충분히(사실 과잉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을 무가치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인지부조화죠. 현실에서 날 조롱하는 놈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수준 떨어지는 병신들이고 난 훨씬 대단해. 그런 내가 인정 받을 수 있는 세상과, 날 인정해주는 인맥들이 있는 인터넷이 내 가치를 정하는 거야.


그렇게 가상 세계에 빠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건전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로 도피하고, 그 세계에서 자신이 부족한 것들을 충족시키며 그 상태에 중독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인간의 적응력은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새롭게 변한 환경에도 금세 적응하고 맙니다. 무슨 극한의 기후나 오지도 아닌 가상세계에 불과한데 적응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죠. 여기서 낙오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일례로 이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나냐면, 노숙자가 되는 사람들은 노숙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처음 경제적인 영역이 무너지고 집도 살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길바닥에 나앉아버리게 되면 처음에는 금방 노력해서 재기하자는 욕구에 꽉 차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낙오자들과 함께하기도 싫고, 난 그런 사람도 아닌데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노숙을 해야할 정도로 무너진 삶을 다시 복구하는 건 노력의 문제를 떠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정신과 각오를 무디게 하기에도 충분하죠. 그래서 그냥 그런 더 낮은 수준의 삶에 적응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해버리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가 어려워지죠.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고 모든 책임에서 탈피해버린 무책임자가 되어버리니 지금까지 살아오며 져왔던 것들이 생각보다 무겁고 불편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냥 너무 편해버리는 거에요. 힘들고 춥고 덥고 배고프고 그러긴 하죠. 근데 구걸하고 어떻게든 살기만 하면 아무 책임 없이 살아버릴 수 있는 겁니다.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먹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살아버리고. 노숙이라는 상황 자체에 중독된 겁니다. 노숙자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죠. 본인의 의지가 있더라도 그 무책임하고 자유로운 삶의 뽕에서 쉽게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갱생하려고 하고 지원도 받아서 상담이나 일 같은 걸 하더라도 금방 다시 노숙으로 복귀하는 경우 꽤 많습니다.


노숙이라는 상황에 중독된 거거든요. 이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다시 멀쩡한 사람으로 갱생시키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대충 난이도가 그 정도는 될 거에요. 수많은 시간과 자원과 인력을 쏟아부어서 케어시키고 자신도, 가족도, 돕는 사람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약쟁이 하나 사람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만큼 노숙자 하나 갱생시켜 사회로 복귀시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죠.



마약중독도 마찬가집니다. 게임이나 음란물, 커뮤니티 같은 것보다 더 쉽게 접하고 그것이 주는 더 강력한 쾌락에 맛을 들리면 마약에 중독되는 거죠. 그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이유 또한 멀쩡한 가정과 건전한 친구 등 인간관계가 결핍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마약중독자 갱생의 어려움을 피력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모순되지만, 베트남전 때 마약에 빠진 수많은 장병들이 미국 사회로 복귀했을 때 수만 명의 마약중독자를 걱정했지만, 의외로 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정과 친구들로 복귀했고 마약에서 벗어난 이유는 전쟁 당시 결핍된 영역을 대체하여 채워주던 마약을 다시 원래의 요소들이 채워줬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마약을 찾게된 장병들이었지만 고향으로 복귀하자 더 이상 마약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약이나 게임, 커뮤니티, 도박 중독은 대체로 불우한 삶, 소외된 환경,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찾아옵니다.


좀 더 정확히 짚자면, 현실의 삶이 가혹할수록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대체하거나, 의존할 대상을 찾게 되는 겁니다.


현실의 단절된 인간관계에서 소속감과 애정을 느끼기 위해 가상의 커뮤니티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더 많은 커뮤 활동을 하거나 더 많은 승리를 위한 더 폭력적인 플레이를 하게 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한번에 뒤집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운 좋게, 어쩌면 호구를 낚기 위해 따낸 손 쉽게 번 돈의 뽕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총과 폭력의 위험 때문에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도 없고 보호할 수도, 보호 받을 수도 없는 가족이나 주변인에게 의지할 수가 없어 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며, 역시 의지할 수도 없는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이 사회의 고독함에서 더 커다란 무언가에 의지하며 믿기 시작한 종교가 광신에 접어들게 되는 것도.


모두 표현형이 다를 뿐 비슷한 유전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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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심리학적 연구결과를 보면 까다로운 인지작업과 유혹의 도전을 동시에 받는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매우 중요한 일이니 1~2분 동안 7자리 숫자를 기억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숫자에 집중하는 동안, 건강에 해로운 초콜릿 케이크와 건강에 이로운 과일 샐러드라는 두 가지 디저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머릿속이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유혹적인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할 확률이 더 높다. 시스템 2(이성)가 바쁘면 시스템 1(본능, 직관)이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시스템 1은 단 것을 좋아한다.


'인지적으로 바쁜' 사람들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피상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인지 부하가' 자제력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불면과 마찬가지로 음주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동료들이 수행한 일련의 놀라운 실험들을 보면 인지적이건 감정적이건 신체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다양한 자발적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신 에너지의 공유풀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나 자제력 유지 노력이 피곤한 일임을 거듭 확인했다. 억지로 뭔가를 하도록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면, 다음 도전이 닥쳐왔을 때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자아 고갈'이라고 한다.


- 다니엘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아이는 자극이 부족할 수록 성장발달이 느려진다고 합니다. 비단 아이 뿐만 아니라 정신의 성장에 있어서도 다양한 자극과 극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적능력의 성장 또한 지적 발달을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하며, 이는 대체로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형성되죠.


중요한 건 단순히 자극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극을 받되, 그것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 있어야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단순히 문제에 자극을 받기만 하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트레스가 되고, 더 나아가 한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어야 성장, 발달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그만한 정신력, 인지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사고와 그 사고에 투자되는 정신력. 그러한 인지작업은 그만큼의 정신 에너지를 소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한 자원이 충분히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삶에 더 여유롭다는 것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지작업에 도전 받아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정신 에너지가 여유롭지 못한 쪽보다 더 많고 더 오래 투자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선비나 귀족의 경우 수년간 충분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고 지적능력 발달에 투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낮은 단계의 인지작업부터 더 높은 차원의 인지작업을 충실히 따라올랐다는 것이기도 하죠.


반대로 매일 일을 해야 하는 농민, 혹은 현대의 일 12시간씩 일하는 막노동꾼이나 시장 장사꾼, 그 외 높은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을 가지는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 그러한 인지작업에 쏟아부을 정신 에너지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이는 육체노동부터 정신노동까지 하루 동안 소모되는 양이 많기 때문이며, 대체로 하루이틀 쉰다고 회복되지도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적은 시간 쉬는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복잡하고 여유를 가져야할 일에 많은 정신, 시간의 투자가 어렵게 됩니다.



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이가 지적 발달에 우월한 조건을 가지는 요인 중 하나는 그러한 자극을 취미, 혹은 자발적 자기계발로 선택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책이나 방송, 다큐멘터리, 심지어 네이버 지식인 활동조차도 다양한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요인이 되는데, 책이나 방송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 활동조차도 평범하거나 어려운 질문부터 황당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질문이 쏟아지는 공간이기에 다양한 생각과 정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컨데, 그러한 공간에서 답변자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거의 결코 생각하거나 정리하거나 찾아보거나 분석할 여지가 없었을 영역이나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생기긴 한다는 겁니다. 즉, 더 많은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인 경우, 더 많은 지적 자극과 그에 대한 처리가 가능한 쪽은 그렇지 못한 쪽보다 지성에서 우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양한 자극(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다양한 결론(답변)을 내놓았기 때문에 생각과 관점의 폭이 넓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훈련된 지적능력과 인지능력이 곧 통찰력으로 환산될 것입니다.



마시멜로 실험 오류 가능성...어렸을 때 잘 참으면 훗날 성공?

https://www.mk.co.kr/news/it/view/2018/07/445129/

(전략) 다만 가정 수입이 적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마시멜로를 빨리 먹는 경향이 나타났다. 부모의 소득이 높지 않은 경우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후략)


경향성의 관점에서, 더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고소득층, 정확히는 고소득층의 자식들의 경우 좋든 싫든 교육에 투자되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강제되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더 여유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다양한 경험을 겪을 수 있고, 그들 중 지성에 관심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적능력을 쌓을 수도 있지요.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더 차분하게 사용하여 고등한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더라도, 설령 틀렸더라도 내용 자체는 더 차분히 정리된 결론을 내놓기에도 유리합니다.


반면 고노동 저소득층일수록 그러하기 어렵죠. 부모부터가 자식을 관리하고 교육시키기에 시간이 부족하고 자식에 투자할 인지력도 부족하게 됩니다. 자식 또한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육비 등 교육에 대한 투자도 받기 어렵고요.



지적 자극을 받고도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지는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 환경에 따라 갈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자본력에 기초할 가능성이 크고요. 물론 자본의 정도에 따라 인지처리능력의 정도가 얼마나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각박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하위 노동자와 그 반대에 있는, 다시 말해 삶의 양극단에 있는 사람의 경우 상당한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다양한 지적자극은 다양한 사고와 결론을 내놓을 것이고, 그렇게 형성된 통찰력과 지성은 정치, 사회,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될 것입니다. 애초에 현대의 다양한 지적자극들은 대개 그러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많은 편이고요.


문제는 충분한 정신 에너지, 인지력을 갖추기 어려운.. 일상적인 자아고갈에 빠져 있는 계층인데, 정말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돈 자체는 적게 버는 사람들일수록 정치, 사회에서 발생하는 지적자극에 충분한 투자를 통해 품질 있는 결론을 내놓기 어렵게 됩니다.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https://konn.tistory.com/703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음.. 이거 꽤 자주 인용하게 되는군요. 위 링크의 글에서 했던 말은 사실 이전에도 간간히 여러 곳에서 자주 했던 말이긴 합니다. 다만 좀 더 짧고 자세하지 못했을 뿐이죠. 저 내용은 본 글의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정치에서 계급배반현상은 오랫동안 관찰되었고, 분석되고 연구되는 주제이긴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해 어떤 분석과 결론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사상이나 이념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이나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거나 상반되게 존재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 지금은 거기에 정신적 여유로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 정의를 독점한 편협한 바보들.

https://konn.tistory.com/706


현대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전문가라고 해도 현실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영역에선 남들보다 조금 더 낫거나 남들과 큰 차이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떠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과 다각도의 관점들을 수렴해야만 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충족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의 조건일 것입니다.


정치, 사회적 현상과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간과하고 너무나도 간단하고 편협하게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계급적 관점에서 하위 계급일수록 노동은 많이 하지만 정작 소득은 적은 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에 더 많은 정신력을 인지작업에 투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복잡하고 어려운 분석의 과정을 스킵해버리고 아주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대체하려고 하지요.


가령, 한반도 평화와 장기적으로 북한 사회에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북한 스스로 개방하거나 개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거나, 현 체제에 한계를 요구하게 만들어 무너뜨리게 한다는 등의 목적을 두고 대북온건책을 시행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과 관점을 이해하거나 상상하기보다는, 저 새끼가 빨갱이라 나라 팔아먹고 북한에 돈 주려고 한다. 가 더 쉽고 간단하며 말초적으로 빠르게 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죠.


그리고 이를 잘 아는 이들일수록 더 간단한 논리와 더 자극적인 문구로 이 계층을 공략합니다. 간혹 기사에서 볼 수 있는 어처구니없이 멍청하고 일방적으로 특정 세력이나 인물을 공격하는 자극적인 발언들은 그들이 딱 그 수준의 지적능력이나 사고력, 사상의 극단성을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그들의 사회적 성취과 그 기반이 되는 지적능력을 고려했을 때 인지작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하위 계층을 조준하고 날리는 정치공학적 계산의 산물일 수 있는 것이겠죠.



인민들을 너무 배불리면 딴 생각을 품게 된다. - 김일성.


그리고 그들의 지지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많습니다. 60년대, 80년대, 심지어 90년대와 IMF를 겪어왔던 세대가 여전히 살아있고,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히 다른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60년대의 대한민국과 80년대의 대한민국은 물질적으로 한 세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발전을 겪었고, 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지금 2020년에조차 그러한 시대적 차이는 단순 시간적 차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대한 간극이 있지요.


다만 90~00년대 세대 아래 쪽으로 공통점이 있다면, 먹고 살기 어렵고 각박함을 실제로 겪어왔던 세대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 의해 여전히 잔재해 있던 구시대의 관성은 여전히 정신적인 세계를 지배했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에도 80년대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 80년대엔 60년대 이전의 각박하고 더 중세적인 태도로 살아가던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물질문명만큼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따라가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정리되는 간극이죠.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그러한 어렵고 배고픈 시대를 겪었던 이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러한 시절의 관성이 여전히 희미하게라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를 곯진 않더라도, 그러한 시대를 살아왔고 충분한 교육, 혹은 여유를 가지고 살지 못한 이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정신적 유연성이 더더욱 굳어져갔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 생각해왔고 받아들여왔던 가치관과 관점으로 여전히 현 시대를 바라보겠지요. 누구누구는 빨갱이고, 어느 정당은 빨갱이이며, 어느 진영과 이념은 빨갱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물리쳐 없애야할 적이지 타협하고 협상하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까지...


먹고 사는 문제로 여유롭지 못함이 사고와 인지능력에 좋은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겁니다. 이는 교육을 통한 기술과는 다릅니다. 농부가 농사일과 농사 기술에 통달했다고 해도, 오랜시간 동안 지식을 쌓아오고 다양한 지적 자극을 처리해왔던 선비의 큰 그림을 보는 능력, 사회적 통찰력에는 전혀 비교될 수 없을 가능성이 큰 것처럼요. 


정치적으로 안정되거나 수준이 높은 국가는 선진국들이 많습니다. 민주주의나 법치, 문민통제, 교육 시스템 등 여러 제도들을 오래 경험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그만한 의식수준에 도달해있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의식수준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찾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곶간에서 인심나듯이, 각박한 사회였다면 각박한만큼 더 천박하고 더 야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찾으며 사회적 신뢰나 정치, 사회적 불문율이 무너지며 관습적 도덕 영역이 조금씩 침해되었을 겁니다. 더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던 조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것이지요.


먹고 사는 게 여유로울수록 정신문화는 발달하게 됩니다. 영화나 음악, 미술과 같은 연예, 예술도 그러하겠지만 철학이나 미학, 인문학과 같은 정신적 세계를 다루고 파고들어가는 체계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이는 개개인에게도 그러한 문화를 더 폭넓게 접하게 하고 더 기준이 높은 눈을 가지게 되죠. 전체적인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반면 그러한 점을 알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 권력자들은 그러한 상황을 경계합니다. 더 낮은 임금 수준, 더 긴 노동시간, 문화에 대한 탄압 등으로 삶에서 인지력의 소모를 발생시키고, 정적을 꾸준히 공격하고, 논란을 내보내면서 그에 대한 대중의 인지력 소모를 유도합니다. 조국에 소모된 대중의 화력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여러 사건, 공격에서 그 당시의 화력과 집중도가 떨어지죠. 이미 조국 사건 때 많은 화력을 소모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정신 에너지, 인지력에 소모가 발생할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얼마만큼 문제가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저런 사건으로 꾸준히 소모되고, 삶에 치이며 이미 자아 고갈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하나하나 따져가기엔 투입될 수 있는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정치와 사회가 건전하고,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개개인이 여유로운 환경에 놓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찾아오는, 맞닥뜨리는 지적자극을 처리하면서 말이죠. 정치와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더 많은 정신 에너지와 인지력을 투자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복잡한 사고를 하면서 더 나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접하고 조잡한 논리와 결론을 내놓으며 잘못된 판단을 내놓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적자극을 더 여유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여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고, 이는 경제적, 정신적인 여유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많을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든지, 청년 실업을 해결해야 한다든지, 교육열을 줄이고 잉여로운 시간을 더 늘리게 해줄 수도 있고, 최저임금을 높혀 더 여유로운 경제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하거나, 복지 등 사회안전망으로 정신적 여유를 보장, 부담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사람들이 다양한 지적자극을 회피하거나 단순무식하게 처리하기보다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건전한 정치환경을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지적자극을 처리하면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관점은 지성만큼이나 다양할 것이고 그러한 다양함은 또 다시 건전한 사회를 구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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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

https://konn.tistory.com/701

괴베클리 테페에 대하여

cafe.daum.net/Europa/3L0P/5347

메이지 유신: 일본인들이 '태양 너머'를 상상하게 되었을 때

cafe.daum.net/Europa/3L0P/7826




지금은 자삭하신 모양이지만, 과거 첝님이 <이슬람은 왜 이 모양인가.> 라는 글에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작성한 글에서 종교는 단순 신앙의 모체가 아닌 사회적 관계망을 제공하는 기능적 측면을 설명하였습니다. 150명 이상이라는 인지적 한계에 벗어나서도 인구 집단이 유지되고, 서로 전혀 모르는 타인을 사막 위에서 만나도 안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신왕으로서는 거대해진 영토를 감당할 수 없는 통치원리로써의 민족신앙의 한계를 벗어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종교라는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지요.


집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전혀 모르는 남들, 거대한 규모의 타인이 한가지 정체성과 세계관 하에 크고 작은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할이죠. 오늘 처음 만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신-종교라는 틀 안에서는 하나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보편성은 그래서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인종과 성별, 나이와 지역을 떠나서 같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신앙과 믿음의 사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개개인 차원에서는 삶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의지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믿음 그 자체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 종교가 품는 거대한 뜻에 신념적 감동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는 그러한 사회적, 통합적 기능이 매우 주효하게 작용하죠. <한국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에서 설명했듯,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 중 일부는 인간관계와 정보의 공유를 위해서일 겁니다. 교회만큼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의식적 행위를 하며 소속감을 공유하고 인간적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교회는 단순 신앙을 위해서가 아닌 적극적인 사회활동의 일부가 됩니다. 단순 성경 공부를 하고 교리를 나누고 공동의 의식 행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개인적인 삶을 나누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지요. 뭔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이사를 가는데 도움을 받거나 집안 가구를 옮기는데 거들어줄 수도 있고 자식 컴퓨터에 이상이 생겨서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아저씨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있으며, 결혼을 축하해주고, 부고를 같이 슬퍼해주기도 합니다.


젊은이에겐 새로운 친구나 지인, 심지어 애인을 찾는 창구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이러한 사회적 관계로 작용하는 교회의 커뮤니티성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아니면 이러한 커뮤니티는 나타날 수 없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동호회나 모임, 동창회나 종친회, 향우회, 특정 직종의 협회 등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더, 스포츠가 바로 그러하죠.


다른 집단들이 제각기 규모가 작거나, 정기적이며 잦은 모임이 어렵거나, 다양한 직종과 신분이 모이기 어려우며,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교회 등 종교의 커뮤니티성에 비하면 그 개방성과 규모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어느 지역에든 있곤 하다보니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해도 그곳의 교회에서 꾸준히 같은 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기적이고 잦은 교류가 가능합니다. 이는 종교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와 유사한 개방성과 규모를 가진 다른 정체성을 없을까? 있습니다. 정확히는, 있긴 합니다. 바로 스포츠지요. 스포츠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집단의 화합을 유도하는 촉매 역할을 햇습니다. 같은 그리스 문명권이긴 했지만, 그 내에서 구분되는 서로 다른 집단들 또한 스포츠라는 요소에 통합될 수 있었지요. 서로 즐기고, 열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적 열의와도 일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하지요.


현대에서도 스포츠는 세계인의 화합을 위한 역할로 주목 받았습니다. 냉전 때에도 스포츠로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희망했고, 서로 다른 국적, 서로 다른 인종,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 종교의 차이에도 스포츠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 열광하게 만들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하였지요.


예전 중동 쪽으로 파병 나간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전혀 다른 인종에 말도 안 통하는, 완전히 자신의 세계관과 단절된 험악한 인상의 현지인이 맨유, 박지성이라는 공통된 관심사에서 금방 잘 통하지도 않는 언어로 소통하고 축구 경기를 보며 즐겼다고 합니다. 스포츠는 과장 좀 덧붙혀서, 현대의 종교입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요소 중 많은 부분을 스포츠 또한 가지고 있지요. 첝님이 그린 신을 정점으로 하는 관계 연결망에서 신-종교를 스포츠로 치환한다면 꽤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포츠가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결코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전 세계에 수많은 종교가 있긴 하지만, 보편종교라 불리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불교계 종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들은 그 세력이 작습니다. 그 지역 내에서는 충분히 통할진 몰라도, 세계적 관점에서 신토는 너무 애매하고, 어느 제3세계의 전통 민족신앙은 설 자리가 없지요.


따라서 대체로 아브라함 계통과 불교로 양분되는 세계의 종교는 적게 보면 서너덧개 정도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신을 모시는 것치고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야 그렇다치고요.


그러나 스포츠는 종류가 많습니다. 축구, 야구, 농구 정도가 메이저한 스포츠이고, 지역에 따라 미식축구나 달리기, 무에타이, 하키, 심지어 e스포츠나 체스마저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물론 종교도 종류가 많고 세세하게 분류된다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니 분류될 수 있듯이, 메이저한 몇 종목을 제외하면 스포츠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은 대체로 어딜가든 가톨릭이고, 개신교도 좀 차이야 있겠지만 어딜가든 개신교일 수 있으며, 이슬람이나-시아파와 수니파 정도는 구분해야겠지요;;- 유대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스포츠는 지역마다 리그가 다르고, 그 리그만큼 지역색이 차이가 나곤 합니다. 그리고 리그의 수준에 따라 우열이 나뉘기도 하고요.


이는 바로 이어지는 스포츠의 경쟁성과 결부되어 스포츠의 보편성, 통합적 측면에 어느 정도 대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상대가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스포츠의 핵심은 바로 경쟁이지요. 상대 선수와, 상대 팀과, 상대 지역과, 상대 국가와 경쟁을 하는 구도입니다.


경쟁이라는 요소는 흥미와 재미, 발전성에 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지만, 언제나 정도가 지나치게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차별하거나 조롱하거나 아예 훌리건 등 폭력 따위를 휘두를 수도,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등 스포츠맨쉽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죠.


또 하나 더, 교회와 같은 커뮤니티성을 가지기엔 꽤나 느슨한, 어떻게 보면 파편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스포츠, 더 좁게는 리그나 팀, 선수라는 관심사를 공유하여 같은 정체성 내에 소속될 순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포츠라는 영역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라는 한 장소에서 주기적이고 공통된 의식을 하듯 경기장이라는 한 장소에서 대체로 주기적이고 공통된 경기를 관람하지만 그 이후, 혹은 그 사이사이 인간적인 관계를 내누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나눈다 해도 자기 친구나 동료, 가족과의 관계일 뿐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리와 알게 된다고 해도 몇명 되지 않는 협소한 인간관계이고 대체로 오래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커뮤니티성은 경기장에서 같은 팬끼리라기 보단, 영국의 펍과 같은 곳에서 경기를 시청하는 이들끼리 형성되기 더 쉽죠.


스포츠 팬들끼리의 커뮤니티는 대체로 해당 스포츠와 관계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과 감정을 나눌 뿐, 좀 더 삶에 가까운 곳까지 연결되지는 않으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 연결망으로 이어져 교감을 나누고 아는 사이가 되는 것과 다르게 대부분의 스포츠팬들은 스포츠라는 거대한 틀 안에 있지만 대규모의 실제적 연결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팬으로서의 정체성은 형성되어도, 실제 해당 경기장에 모이는 지역사회인들을 수십, 수백명씩 알게 되거나 안면을 트게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삶에 더 밀접한 면모와는 차이가 있지요. 이렇듯 종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부분들은 규모와 밀도 양면에서 다른 영역이 비등하게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믿음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제외한 채 바라보아도 종교는 여전히 현대에도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기능을 하기에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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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좀 더 생각해보니 이슬람, 유대교 등 같은 종교라도 파벌간의 투쟁과 배타성을 너무 간과한 듯 싶습니다. 너무 단순화시켰네요.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교가 신을 정점으로 하는 통합, 질서를 요구하는 개념이라면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나누어 경쟁하는 식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도리어 종교 쪽의 분열과 경쟁, 갈등은 그러한 신의 뜻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더 교조적이고 용납의 여지를 줄인다면, 스포츠는 상대를 말살할 경우 스포츠가 성립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선의의 경쟁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특기할만 합니다.


더욱이 종교는 애당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기준과 행동 및 사고방식을 제시하기도 하다보니 인간의 실제적 삶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지만,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어디까지나 놀이에 한정된 개념이다보니 삶에 더 가까울 수는 없지요. 스포츠가 스포츠맨쉽, 한계의 돌파, 극기의 극복 등 정신적인 부분에 가르침 따위를 주는 건 사실이지만 어떤 총체적 윤리, 도덕률을 제시하고 지킬 것을 요구하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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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소통 태도란 남들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길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을 토론이나 논쟁, 혹은 일반적인 소통 상황에서조차 일부러 상대방이 낚이길 바라며 스스로 논파될 장소로 유도하는 식의 소통을 말합니다. 


어디에 원래 이런 용어가 있는 건 아니고, 글을 써서 지적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만든 용어입니다.



간혹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소통 중 자신의 우위와 승리를 점하기 위해 논리나 팩트의 일부를 나열하며 지리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곤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과 근거를 잘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서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박과 논파를 위해 그 일부만을 짧게 내놓고 그것을 상대방이 물어 뜯다 논리적 허점이나 모순을 유도하는 거죠.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고 날 더 우월한 지성인으로 설정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을 만들 목적으로 주로 발생한다고 봅니다. 논쟁 대상자를 논리적으로 두들겨패고 팩트로 무너뜨리며 유린하기 위한 태도인데, 이런 태도가 성공할 경우 지적 쾌감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우 즐겁죠.


하지만 그런만큼 이게 잘 통하지 않을 경우, 상대방도 똑같은 태도로 대응하면 매우 지리하고 무의미한 소통, 논리적 참호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서로의 허점과 모순을 찾기 위한 싸움이 되는 거고 이 과정에서 갈등,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쉽습니다. 다시 말해, 점점 격해지면서 말싸움이 되기 쉽다는 거죠.


생각보다 많은 논쟁은 처음부터 성실한 소통 태도로 임했을 경우 발생하지 않거나 더 생산적인, 유의미한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분쟁이 아닌 끝을 볼 수 있곤 하죠. 그러나 함정식 소통태도는 그러한 결론을 내놓기 어렵게 됩니다. 처음부터 문제의 핵심을 짚어 그 모순점이나 문제점을 무너뜨린다면 단 한 줄의 논리도 위력을 발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죠.


하나의 문제에 대해 한두 가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다면 정말 좋고 편하겠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관점과 생각이 제나름의 합리성과 의미를 지니며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덜 합리적일 수 있고, 그 논리적 구성이 탄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한 의견과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바탕엔 의외로 반박하기 어려운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죠. 논리는 좀 허술하지만, 맞는 말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한 줄의 논리로 논파했다면 정말 멋지고 재밌는 일이겠지만, 실제로 그러긴 어렵죠. 오히려 쿨병 걸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에 논리와 근거를 충실히 마련하는 성실한 소통이 상호 모두에게 이로운 태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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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난 당시에, ‘여성’의 역할에 갇히는 느낌이 견딜 수 없어서 화가 난 상태였다.

뒤돌아보면 그건 사회적 억압과 내 성정체성, 썩 불행했던 가정사 등등이 섞인 결과였다.

어렸을 때야 우리편 vs. 니네편으로 모든게 단순했지만. 돌아보면 그건 결코 단순치 않았다.

사람 일이 얼마나 복잡한 건데. 하지만 그 때는 상관없었다.

내 정신적 불행을 잠시나마 외면하는 데 ‘사상’만한 게 없었으니까.

일단 겁나 가난한 집안이 싫었고, 오빠와 차별대우하는 부모가 싫었고, 너무 일찍 자각한 내 정체성이 싫었고,

내가 짊어진 짐을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세상이 싫었고. 기타 등등. 모든게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면 간단했다.

근데 돌아보면 그냥 이런 생각이 드는거. 그게 뭐? 내가 불행한게 내 주변 개인들 탓인가?

IMF때 폭삭 망한 부모가 나 미워서 날 내보냈을까? 오빠는 잘 되고 나 망하라고 등록금 안보태줬을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굳이 호모포비아라서 날 외면했을까?

나에게 겹쳐진 불행들이 어떤 한 사람, 한 집단의 탓인가? 울분을 토하면 그게 사회운동인가?

하지만 그 때, 그쪽 집단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거의 절대 다수의 내 문제들은 사실 ‘우리편 vs. 니네편’보다 훨씬 복잡했다는 걸.

나를 둘러싼 상황은 더럽게 복잡한데, 이게 단순히 ‘여성의 억압’이라는 필터로 단순화되었을 뿐이라는걸.

난 내가 20년쯤 젊었더라면 요즘 흔한 애들처럼, 깨어있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후략)


한 레즈비언 아줌마의 넋두리.


현대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전문가라고 해도 현실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영역에선 남들보다 조금 더 낫거나 남들과 큰 차이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떠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과 다각도의 관점들을 수렴해야만 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충족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의 조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주의자, 반지성주의자들은 그러한 사회를 너무나도 간단한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는 하는데,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지 않거나 관점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죠. 


문제는 그들이 단지 멍청하기만 한 게 아니라, 고집까지 세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른 시각과 관점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받아들이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고 자신의 관점이 진리라고 여깁니다. 저는 이를 독선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들이 어떠한 사회문제나 정치를 판단할 때 자신의 판단이 정의이고 다른 관점과 다른 생각은 틀린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기준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모자란 지성과 편협한 시각과 함께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한두 가지의 간단한 논리와 딱 그 수준의 사고로 제단한다는 겁니다.



제가 보는 소설 중 천마신교 낙양지부(2부는 낙양본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작가가 무공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으로 서술하였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공은 불세출의 천재(입신의 경지)가 어마어마하게 넓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전체를 그려 만든 무공이기에 뛰어난 오성(재능)을 가지고 그가 만든 체계를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 인재라면 시간이 느릴 뿐이지 꾸준히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반면 마공의 경우 위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자신의 논리와 관점을 점점 체계화시켜 마공을 뜯어고치고 발전시킨다는 점인데, 문제는 이럴 경우 낮은 수준의 체계에선 충분히 통할 정도의 논리와 형식을 갖추어서 별 문제가 없지만, 그 체계를 그대로 쌓아올리다보면 체계 스스로 모순이 발생하고,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할 때 주화입마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잘해야 마공을 잃고 평범or폐인이 되거나 나쁘면 걍 죽죠.


그럼 천마신교의 마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서로 다른 관점과 개념을 가지고 무공을 만들거나 발전시켜가는 다른 마인과의 교류를 늘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저변을 넓히는 것이죠. 자신의 무공을 나누고, 자기가 준 만큼 다른 무공을 배우며 자신의 무공이 가지고 있는 근본 한계를 넓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가지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 현상이 닥쳤을 때 반드시 오류가 발생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시각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체계 내로 편입시키면서 모순과 오류를 해결한다는 겁니다.


이는 무협이라는 소설 내의 설명이지만 이러한 관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느껴지더군요.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바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반지성주의, 혹은 극단주의라 부르는데, 이는 반지성주의와 극단주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공유되는 교집합적인 부분, 혹은 서로가 서로의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쪽일 것입니다. 반지성주의자이기 때문에 극단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주의자이기 때문에 반지성주의로 빠지거나.. 


일베나 메갈류가 그렇죠. 그들은 매우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수준 낮은 논리와 사고로 판단하려 합니다.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https://konn.tistory.com/703


앞서 짚었던 편협한 시각, 저열한 지성을 고려해보면, 복잡하고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을 가진 이들일수록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잘 먹힐 수밖에 없는 거죠. 최근 많이 비판받고 지적이 나오는 사이버렉카와 그들의 추종자, 무사트와 그 직원들에 대한 공격을 하는 자들이 많고 그러한 행위에 죄책감이나 가책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행동을 정의롭다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제 삼는 현실의 여러 현상과 객체들은 제각기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것들인데 너무나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걸 더 떨어진 지성으로 판단하다보니 저열한 결론이 나오고, 그들의 쓸데없는 고집은 자신을 정의의 포지션에 설정하는 거죠.


애당초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한다 여기지만, 객관적 현실은 전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듯이, 그들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에 있지 그들의 주관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가지는 한계 덕분에, 그들의 철학도, 신념도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하나 최소한 체계가 정립된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한계와 함께 어떤 것을 판단할 때의 유일한 기준은 자신들이 소속된 커뮤니티에 형성된 분위기거나 그저 자신의 기분, 비위에 불과합니다.


더닝-크루거 효과에 대해서는 익히 아실테니 굳이 설명하고 넘어가진 않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가르치려들면 감히 나를 가르치려한다며 역으로 가소롭게 여기죠. 정작 본인들의 저열한 지성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요. 


너 자신을 알라는 시대를 초월한 금언인 이유가 있는 법이죠. 하여간 자신의 무지함과 편협함을 자각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이 독점한 정의의 자신감을 기반으로 오히려 남들을 가르치려하고 넌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일베, 메갈이 자신의 태도와 가치관을 자랑스럽고 비판받거나 논파 당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죠. 지금은 내가 잘 몰라서, 니가 말이 안 통해서 포기하는 거지 내 관점과 사상이 틀린 건 아니다. 라고.


그런 이들이니 공정이나 정의라는 것도 앞서 언급한 기준에 따라갑니다. 소속된 집단의 분위기나, 자신의 기분과 비위. 이걸 직관이라고 하면 직관이겠지만, 그 직관도 지성을 기반으로 하는 통찰력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윤리나 가치관, 철학이나 사상을 비웃고 비판하고 하는 거야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부터가 그러한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언제나 이중적이고 사안에 따라 다른 기준이 될 수밖에 없죠. 그 기준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다르고 자신의 비위에 따라 달라지는 가볍기 짝이 없는, 가변적인 물건이 되는 거고요.


일베와 메갈을 위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편협성과 독선성이야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이고, 단지 이들 집단 뿐만 아니라 현실과 인터넷 어디에서든 존재합니다. 심지어 우리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면 중요한 건 정도죠. 선을 넘거나, 지나쳤다는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도 아닐 수 없는 요소에서 남들과 다름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인터넷의 악플러들이 연예인이나 일반인을 죽이고, 누군가의 아내를 유산시키거나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이 생기게 괴롭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정의라 여기는 편협한 바보들이 독점한 정의를 휘두르는 쾌감에 빠지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죠.


반성도, 성찰도, 고민도 없고, 무언가를 판단하고 적절히 설명해내기엔 판단력과 합리성이 부족한 겁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대법관이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뛰어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죠. 기껏해야 인터넷에 나돌아다니는 글 몇개 주워읽은 것이 다일 것인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며 뭐라도 되는 듯이 굴죠.


그들의 태도는 소아병적이고, 비대한 자아가 여물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좁아터진 세계관 속에 남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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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에 있는 건 맞는데, 그 기반이 증오와 혐오에 있다보니 더더욱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우파로 갈수록 그 경향성이 강해지는데, 그들에게 북한은 말살해야할 적이고, 대화나 타협,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전에 극우보수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을 상실하기에 안 되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는 정치적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결론이라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장된 세뇌와 관계된 내용입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룰에 의해 굴러가고, 전혀 다른 질서와 원칙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서구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같은 잣대를 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북한에도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칙들은 존재하고,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곤 합니다.



북한이 헌법상 국가가 아니더라도, 이미 90년대부터 사실상의,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임을 은연중에, 훗날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북한과 어떤 진전을 이룩하고 싶다면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하고, 마찬가지고 북한에 불만이 있어서 항의하거나 압박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혹은 국가대 국가로 사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압박 카드를 적용해야 하죠.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보여줬듯이, 북한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그들이 한 것은 대화나 협상 따위가 아니라 일방적인 조치들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되려 자해를 입게 만드는 경우조차 있었죠. 



이는 북한을 국가, 정부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북한에게 북한 나름의 주권이 있다고 보질 않는 거죠. 그렇다보니 매우 비정상적인 요구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거의 일방적으로 북한이 굴복하고 우리의 조건, 요구를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러하죠.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발생하는 문제, 특히 한국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그들의 조치나 행동이 그들에겐 상식적인, 자기들의 원리와 원칙에 충실한 행위였음에도 그러한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공분을 일으키거나, 실제 분노할 사안에 대해서도 맥락상 미묘하게 갈리는 입장에서 분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북한 자체에만 적용되는 태도가 아닌, 북한에 대해 판단하거나 표현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이번 유시민의 발언도 그렇고, 가끔 나오기도 하는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좋게 들릴만한, 혹은 욕이나 증오 표현이 아닌 표현들은 죄다 욕을 먹게 됩니다. 북한과 관계되면 객관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죠. 말살해야할 적이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아예 안 되는 겁니다.


유시민의 계몽군주라는 발언이 비판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욕을 먹거나 적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이미 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는 것은 인지부조화이고, 객관성의 상실입니다.


김정은이 북한을 개혁하고 개방까지 보는 듯한 사인들이 드러나며 기존 체제에서 개변을 원한다면 그걸 뭐라 부를까요? 계몽군주라는 표현 자체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님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죠. 왕조 국가라고. 요컨데, 저 표현이 비판을 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런 걸로 열불내는 건 아직도 왕조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6.25 이후, 그리고 독재 정권에 의해 더더욱 조장된 반공정신과 사상이 비판이나 반성,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진리의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이들에게 북한은 몇번씩이나 말했듯, 말살해야할 적입니다. 적이라도 타협이 가능한 종류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대화도, 타협도, 협상도, 거래도, 협력도 불가능한 지워버려야할 안티 그리스도인 셈이죠.



그 갈래는 북한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친북적이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는 혐북이 아닌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극우보수 세력이 진보좌파를 대할 때, 대화나 타협보다는 없애버려야할 적으로 규정한 채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는듯한 모습들을 굉장히 자주 봤습니다. "빨갱이는 죽여도돼."로 대표되는 가치관이죠.



북한이 적인 건 사실입니다. 종전을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게 아니더라도 의심스러운 잠재적 적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객관성을 상실한 뒤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지워놓고 전쟁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버튼만 남겨두고 무한정 대기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운영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북한에 유리하게 들리는 모든 표현에 빨갱이 필터를 씌우고 보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북한이라는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먼저 판단해보고, 남북관계라는 특수성 하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도 같이 판단해봤으면 합니다.


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별세계 관계까진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 상식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부분을 적용 가능한 세계이고요.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발전을 원한다면 북한을 대하기 위해 좀 덜 감정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영역에 서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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