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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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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22.11.30
    못 배운 윤석열의 법치주의에 대한 몰이해.
  2. 2022.11.23
    왜 갑자기 언론의 마약 관련 이슈가 줄어들었을까?
  3. 2022.11.19
    약자에 대한 멸시와 힘의 논리.
  4. 2022.11.16
    오세훈과 윤석열 정부의 실제 언론탄압.
  5. 2022.11.13
    사회적 질병에서, 사회적 질서가 된 부패.
  6. 2022.11.13
    스캐치팹Sketchfab 판매자 등록 방법.
  7. 2022.11.13
    3D모델링 거래 사이트, CGTrader 가입 및 등록.
  8. 2022.11.12
    유니티 엔진, 그림자 강하게 하기. 그림자 세기 조절.
  9. 2022.11.12
    유니티 2021버전 앰비언트 오클루전AO 조절하는 방법.
  10. 2022.11.12
    유니티 포스트 프로세싱 세팅 및 팁.
  11. 2022.11.12
    Unity 엔진 그림자 뚫리는 현상 해결법.
  12. 2022.11.12
    한국 언론 환경은 어떻게 이 꼴이 되었는가?
  13. 2022.11.11
    러시아는 병력이 돌아오지 못하는 걸 바랄 겁니다.
  14. 2022.11.06
    일본과 경상도의 유사점 및 착취적 패권의 관성.
  15. 2022.11.03
    북한이 왜 우리 영해에 탄도미사일을 쐈냐면.
  16. 2022.11.02
    하나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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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尹 "법 안 지키면 고통 따른다는 것 알아야 법치주의 확립"
https://v.daum.net/v/20221129160534869

 

보수들의 법치에 대한 개념은 피통치자. 다시 말해 국민들이 부담하고 준수해야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법치를 물어보면 법을 지키고 준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틀렸습니다. 그건 준법정신이라고 하는 거고, 법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법치란 권력이 법과 제도에 따라 통치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정부나 정치인, 국가의 대표가 법과 제도에 따르지 않고 무당이나 무속인 등 비선이 국정과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큰 폭력이자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행해왔던 발전과 노력을 역행하는 행위입니다.

 

 

오랫동안 인류 역사는 왕정, 과두정과 같은 소수가 권력을 독점한 체제의 지배를 받았고, 이들에게 법은 가변적이었으며, 왕권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은 중요한 원칙이고 질서였지만, 강력한 왕권(=군사력)은 법 위에 서있었고, 강력한 왕권은 법질서보다 더 높은 권위 아래에서 국가를 통치했고요. 때때로, 어쩌면 자주 왕국의 법이란 국왕의 말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고, 법과 제도에 의해 작동하는 법치주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국민들이 뽑아준 대표들이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국가 내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은 그 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법과 제도의 준수에 가장 큰 책임을 지니는 것은 당연히 권력자이고, 국민이 뽑아준 대표들입니다.

 

법치란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판단과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가변적이고 모순적이며 공정하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은 기준이 아닌 국가의 독점적 규범인 법과 제도를 근거로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부와 정당은 법에서 규정하는 제도에 따라 통치에 임해야 하며, 이것을 어기거나 형해화하는 것은 범죄에 속합니다. 가령, 대통령이 비선의 지시와 목적에 따라 부역하는 경우가 그러하고 국정에 대한 권한이 없거나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영역에서 영부인이 판단하여 지시를 내리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보수의 법치란 국민이 준수해야할 준법정신과 오용되거나 아예 개념 자체를 틀렸기 마련이고, 그러한 편린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비판을 피할 수가 없죠.

 

윤석열 대통령도 검찰 출신이라 그런지 법치에 대한 개념 자체가 틀렸는데, 9수를 하는 동안 법치에 대해 공부하기는커녕 누군가에게 배워본 적도 없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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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 - [취미/이야기] - 할로윈 참사, 보수가 또 사람을 죽였다.

https://www.bigkinds.or.kr/

 

11월 1일~11월23일 마약 키워드 뉴스기사 검색 결과.

11월 23일까지 총 1340건입니다.

 

 

 

10월 1일~10월31일 마약 키워드 뉴스기사 검색 결과.

 

10월 동안은 2371건이고요.

 

 

9월 1일~10월31일 마약 키워드 뉴스기사 검색 결과.

9, 10월 합치면 4354건, 8월부터 집계하면 5000건이 넘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8월달 마약 관련 기사는 약 1000여건 정도라는 거죠.

 

9월, 10월이 이전 달, 이후 달에 비해 2배 가량 많이 나왔고, 이태원 압사 사건 이후 반토막난 기사량 중 대부분이 마약 사범에 대한 위기감, 문제의식 조장보다 사건 자체와 그에 대한 책임추궁 등 정치적 이슈들이 대부분에 가까울 것이라는 걸 고려하면 실제 마약 관련 기사 자체는 반의 반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유의미한 변화량이죠.

 

 

 

9월, 10월 동안 누가 마약 걸렸고 어떤 인플루언서, 샐럽, 연예인 마약 했다고 뉴스 기사 나오고 마약 유통이 어쩌고 이제 한국도 마약 청정지대가 아니네 어쩌네 하는 기사들, 이야기들 많았던 거 기억하실 겁니다. 

 

근데 이태원 사건 이후 마약 관련 기사들이 확 줄어버렸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면, 아주 간단합니다.

 

정권, 정확히는 한동훈의 법무부가 마약 범죄 관련 인식과 분위기, 문제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할로윈 때 이태원 일대에서 마약 범죄 일망타진하는 식으로 큰 성과를 올려서 뭔가 좀 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거든요.

 

오히려 이 문제 불거질수록 경찰 배치와 동원 인력 관련해서 포커스가 이동하면 그런 인력, 배치, 구성 누가 지시했고 최종 책임자가 누구냐와 그렇게 했던 이유가 뭐냐는 식으로 옮겨집니다.

 

그럼 기자들한테 문자 날렸던 것처럼 정부가 마약 관련 성과 내려다 이렇게 됐네? 근데 그 책임소재 타고 올라가보니 법무부 장관이 나오네? 이렇게 될까봐 다들 약속한듯 입 닫고 다른 이야기 쏟아내는 중이죠.

 

 

 

 

 

 

[단독] 참사 직전까지 112 신고 '79건'…근처 기동대는 퇴근
https://n.news.naver.com/article/055/0001009981?sid=102
경찰 200명 아니었다…실제 이태원 현장엔 137명
https://v.daum.net/v/20221030204006325
 

 

법무부는 이번 일로 뭐 좀 해보려다가 대형사고 친 거고, 언론 카르텔은 책임자들과 손잡고 장난질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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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극단주의 사상은 몇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보입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 글의 주제인 약자에 대한 멸시가 그러합니다.

 

파시즘을 비롯하여 강자는 약자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지니고 힘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죠. 옳고 그름의 기준은 힘의 강약, 승리와 패배로 구분되며 승자는 절대적 무오성을 지닙니다. 제왕은 무치하고 군주의 잘못은 기군을 망상한 간신의 탓이 됩니다.

 

정치에 있어서 더 극단주의적인 집단을 찾기 위해선 간단한 몇가지 징후를 파악하면 됩니다. 제가 제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더 무책임하냐에 대한 것입니다. 극단주의 집단은 무오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에 남탓으로 책임을 돌립니다.

 

책임자에 속하는 권력, 권한을 지닌 더 높은 사람은 그에 대한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합니다. 도리어 책임을 묻는 입장이 되길 원하죠.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서로 섞이기 쉬운 조합입니다. 파시스트, 나치, 극우주의자, 종교적 광신도 등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숭배하는 이유는 힘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익 때문이고,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는 그 과정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더 많은 힘을 가져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그 힘은 책임에 대한 회피 역시 가능하게 해줍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마땅히 더 큰 책임을 져야하지만, 이들의 정신이 말하는 원리는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까지 올라가 그만한 힘을 가지는 것이거든요.

 

범죄를 저질러도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책임을 벗고 타인에게 씌웁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정적에게 엮어서 뒤집어 씌우고, 검찰과 경찰을 비롯한 법집행기관을 통해 조사를 불충분하게 하거나 기소를 이상하게 하거나 근거를 적절치 않게 수집하여 제출하기도 하고, 유리한 판단을 내려줄 판사를 배정받게끔 하는 방식도 있고 그러한 판사를 사전에 기름칠을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 부하 직원이나 하위 기관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 책임추궁을 본인이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거래 하는 방법도 있죠. 조폭들이 네가 대신 빵에 들어가주면 나중에 잘 챙겨준다, 얼마 주겠다는 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전가되고 권력자, 기득권은 결과적으로 무오하게 되죠. 법적으로 그러한 판정을 받지만,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법에 맞추는 인식을 보편화 시킬 수록 법적으로 무오하게 판정받기만 하면 도덕적으로도 무오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부분에 있죠. 내가 저지르는 잘못을 아랫사람, 약자들이 지게 되기에 잘못한 쪽은 약자가 되는 겁니다. 사건사고의 책임을 일선의 말단과 그들을 직접 지휘하는 이들에게 전가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말단, 기껏해야 중간관리자급에서 꼬리가 잘려지는 거고 이들이 잘못한 게 되기 때문에 나쁜 건 그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오한 권력자와 부덕한 아랫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며, 그 구분은 철저하게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잘못을 네가 책임지게 되었으니 나쁜 건 너라는 거고, 그런 처분을 위해서 권력은 누구보다 영악하고 유능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이 정말 유능하고 뛰어났으면 그런 사건사고, 범죄가 발생하지도 않았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 권력과 힘을 남용하여 법과 제도를 어겨서라도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자신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권력과 힘을 통해 약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힘을 추구한 것이죠. 앞서 말했듯,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기에.

 

 

당연히 피해를 보는 약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편에 선 자들은 불만을 가질 겁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남탓하냐고, 무책임하다고.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불만이면 힘을 기르라고.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성공해서 바꾸라고.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약했기 때문에 날 징치할 수 없고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고요. 옳고 그름, 도덕과 부덕, 윤리와 비윤리가 아니라 힘의 유무에 따라 정의는 구분되는 거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미 성공하고 힘을 가진 자신이 옳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자들이 떠드는 건 그저 소음공해에 불과하고, 힘도 없고 불만만 많고 시끄럽고 귀찮은 개돼지들이 되는데, 그래야만 잘못한 게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되며,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을 공격할수록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을 더 천하고 질 떨어지는 집단으로 설정해야만 자신의 더러운 행위들이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정신적 기제가 그들이 대중, 서민을 저열한 것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을 그들에 비해 우월하다 여기게 만드는 것이며 과정이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얻어낸 결과의 정당성이 떨어진다면 그 과정을 정당한 것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에 도덕, 윤리나 법적 정의가 아닌 힘의 강약과 유무를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 현 사회의 기득권, 권력자, 지도층 다수일 경우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을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선 그들이 해왔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올바르고 정석적인 성공의 공식일 것이며, 그들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역시 그들의 사상을 공유해야하기 때문인데다, 자신이 그들처럼 될 수 없더라도 그러한 성공을 자신의 현실과 무관하게 추구하는 이들이기만 해도 그들의 지배적 사상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지배적 사상 내지는 그 사상대로 행동하여 성공한 기득권, 엘리트들이 사라지거나 패배하지 않는 한 더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부정한 방식으로 성공하고, 힘의 원리에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이 성공하며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는 사회일수록, 도덕과 윤리는 계속해서 도전받고 그 영향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성공과 힘에 비해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고 때때로 경쟁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될 뿐입니다. 저자가 더 나쁘기에 덜 나쁜 내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런 방식이 관성을 얻어 정의의 기준을 뒤바꾸게 될 것이고 이는 우리가 말하는 비상식의 상식화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어째서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이 패배하며, 그들의 영향력과 세력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약하고, 시민들은 왜 더 부덕하고 비윤리적인 이들을 지지하느냐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약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힘은 상대적이고, 서민이나 저소득층 같은 약자조차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멸시하며 부정한 방식을 정당화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크고 작은 이득을 취하길 바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길 바랄 뿐이죠.

 

그러나 약할 수록, 아주 작은 죄조차 그들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전가할 힘이 없어서 결과적으로 더 높은 범죄율에 일조하고 더 삭막하고 각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원이 되며 당한 사람은 그 방식을 답습하여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할 기회를 추구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지위적으로나 평범한 사람들조차 그러한 지배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도덕적 선택보다 비도덕적이더라도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선택을 기꺼이 할 것이고, 그걸 위해 타인이 피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더라도 양심의 작동이라는 정신적 불쾌함과 도덕적 비난이라는 외부적 공격을 방어하고 정당화할 힘의 논리로 그것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 흔하고 전통적인 다양한 변명들이 나올 것이고요. 너희라고 안 그랬겠어? 어쨌든 이익 봤으면 그만. 너희라고 얼마나 깨끗하다고 등등..

 

 

그러한 힘의 논리에 따라 약자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대한 공감의 대상이나 보호와 연대의 파트너가 되는 게 아니라 멸시의 대상이 되며 약자의 범위는 시간에 따라, 양극화의 원리에 따라 더 늘어날 것입니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서민들조차 어느새 부동산, 주식, 직장에서 다양한 피해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럴 때마다 돈이 더 많든가, 인맥이 더 많든가, 머리가 더 좋고 실력이 더 뛰어났거나,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 나와 더 좋은 직장 구했으면 될 거 아니냐는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보호망와 시민들의 연대엔 구멍이 뚫리고 끝끝내 제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요. 누칼협의 정신은 피해자와 약자가 더 나은 대우와 마땅한 권리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약자이기 때문에 어떤 피해를 받았든 고분고분 받아 들이라는 조롱입니다. 누칼협엔 진보가 없고 정체한다면 다행일 뿐인 후퇴 뿐인 정신이죠.

 

누칼협이 정당하기 위해선 불법을 저지르거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억울하다는 말에 해줘야할 말입니다. 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네가 범죄 저지른 거냐고. 하지만 그들에게 정의의 기준은 힘의 논리이기 때문에, 누칼협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 대상을 피해자와 약자에게 씁니다. 네들이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라고.

 

 

이는 사회현상에도 적용되고 국제논리에도, 역사적 판단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전라도가 멸시 받는 이유는 전라도에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가해했던 이들이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극우보수 기득권 내지는 그러한 기득권을 창출하는(=기득권이 제시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며, 한일 관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가해자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인 한국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 역시 한국이 약하고 약해야하는 약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했기에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이 약했기 때문에 정복당한 것이니 조선의 잘못이고, 조선이 강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에 조선/한국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일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들을 비판해선 안 되는 이유 또한 한국이 일본보다 약하기 때문이고, 감히 약자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과 도덕적 무오의 권위를 지닌 강대국 일본에 대해 감히 비판하고 공격하는 이들 때문에 일본이 한국에 보복을 하면 버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일본의 정신과 유사하고 그러한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국보다 일본에 이입하고, 한국의 이권보다 일본의 이권에 부역하며, 강대국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콧방귀에 한국 같은 약소국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이자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그들의 세계관 내에선 너무나도 합리적이며 당연한 공식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들의 외교는 강대국엔 감히 반항도, 주권을 지킬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약소국에 대해선 강짜와 무례를 저질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무지몽매한 국민 대중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이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 엘리트 기득권인 자신들에게 표를 주지 않고, 그 표를 받아 권력을 얻은 이들과의 관계로 얻어지는 이익구조를 복잡하고 귀찮게 만드는 게 싫기에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국내정치와 외교의 작동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죠. 힘의 논리,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에서.

 

이익을 얻는 결과를 위한 과정이 부당하다면 언제든 잃을 수 있기에 그 과정을 정당하게 만들어야 하니 규칙과 도덕, 윤리보다 힘 그 자체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이 사회에서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힘이 있다면 책임지지 않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당함 역시 힘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얻은 이들이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지도층이 되었고, 그들을 성공하게 만들어준 사상은 이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 되어 그들처럼 되고 싶은 이들, 그들에게 이입하는 이들에게 이식되어 이 사회에서 상식과 정의의 기준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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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도 전우용씨 글입니다.

 

TBS 폐지 조례 시의회 상임위 통과…2024년부터 예산 지원 중단
https://v.daum.net/v/20221115104504935
대통령실, MBC 기자 "전용기 탑승 불가" 통보
https://v.daum.net/v/20221109224423163
윤석열 '언론사 파산' 발언에 언론계 "오만·무지한 언론관" 규탄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3462
언론노조 "尹정부, 비판언론 통제·장악 무리수 두지 말아야"
https://m.k-odyssey.com/news/newsview.php?ncode=179571445341596
 
보수 정부는 항상 이랬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언론 탄압이라고 욕하던 바보들은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언론탄압의 예시는 없거나 근거가 희박하고, 보수 정부하에 일어나는 사례와 비교하면 탄압조차 되지 않죠.

자신들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특정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보복과 공격을 감행하며 특정 언론사를 없애버리겠다고 벼르고 나서질 않나 자기 비판했다고 쫌생이 같이 전용기 탑승 불가로 보복, 차별하고 있고..

 

무슨 속 좁은 초등학생들이 찌질거리는 거 보는 느낌이죠.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극우보수는 자신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용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무책임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남탓을 합니다.

 

2021.07.13 - [취미/이야기] - 극우보수의 핵심 속성 : 무책임.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위치는 그러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위치고요. 그리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라는 것은 그 자리를 포기하고 내려오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그들의 가치관 자체가 아랫사람들의 비판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기어 오르고 맞먹으려는 것으로 여깁니다. 굴종하며 비판을 돌리고 돌려서 읍소하는 것조차도 기분에 따라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데 대놓고 비판하는 이들은 자신과 싸우자는 같잖은 것처럼 보이는 거죠. 실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꼰대들과 다를 건 없는데, 그냥 돈이 더 많고 더 많은 권력을 쥔 것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다보니 자신은 언제나 무오한 위치여야만하고 비판은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도전에 대해 반드시 보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지닌 거죠.

 

뉴스를 보십시오. 그리고 극우보수에 속하는 이들이 실제 무슨 말을 했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확인하시고 그 이후 어떠한 대응을 하고 어떤 발언으로 무마하려는지 보세요. 그들은 무책임하기에 남탓을 하고 자기 책임 아니라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이번 김진태의 레고랜드 사건만 봐도 국가에 어마어마한 피해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폭탄을 터뜨렸는데 절대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세훈도 그렇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남탓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한동훈? 그 이전 박근혜, 이명박 시절 보수 정치인도 다 그랬어요. 자기 잘못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증거까지 있음에도 남탓하고 자기책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트 카르텔, 주로 언론과 검찰 카르텔의 도움을 통해 법적인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죠. 그들만의 유리한 경기장 덕분에.

 

 

또 하나는 이겁니다. 극우보수와 같은 위정자들에게 언론은 그 영향력이 막대하고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론이라고 다 똑같은 언론이 아니고 기자라고 다 똑같은 기자는 아니지만, 만만한 진보좌파에겐 누구든 들이 받을 권리가 있는 것과 다르게 언제든 보복하고 공격하고 그러면서도 리스크를 지지 않는 극우보수에게 들이받고 싸우는 이들은 적습니다.

 

사상적인 이유도 있고 입에 물려주는 달달한 돈도 그렇지만 기자와 언론들은 극우보수와 싸우려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같은 편이죠. 그리고 극우보수 진영과 언론(애초에 언론 자체가 대부분 극우보수 진영에 속합니다. 카르텔이죠.)은 그러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에 별 다른 이유가 없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붙어먹는 실정이죠. 같은 카르텔 안에서 서로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책임질 잘못을 무마해주는 일을 합니다. 누구누구 정치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언론이 알아서 덮어주거나 물타기, 양비론 등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검찰과 판사 인맥을 동원해 제대로된 조사, 기소도 하지 않고 재판까지 가도 아주 가벼운 처벌을 해주죠.

 

그렇지 못하는 경우는 몇가지가 있지만, 검찰 카르텔이나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가 아니거나 너무 뚜렷하고 보는 눈이 많아서 그렇게 쉽게 무마하지 못하거나, 리스크를 감당하고서라도 무마할 수는 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없거나. 이런 이유들이 그러하죠.

 

검찰 공화국이 됐다지만 같은 국힘당 의원이어도 검찰 출신이냐 아니냐에 따라 법적 처분이 달라지는 사례도 있으니.

 

 

여튼, 극우보수는 언론의 힘과 영향력을 알고 있고 그걸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대중들을 통제하고 프레임을 규정해왔습니다. 의제를 선점하며 대중들에게 특정 이미지와 프레임을 각인시켰죠.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힘을 지닌, 그리고 그토록 편하게 정치를 해주는 언론이 자기들 편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될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는 거고, 자신들만의 카르텔에 속하지 않거나 벗어나려는 놈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본보기를 보이고 두려움을 조장하며 다른 언론사, 기자들에게 개인행동, 돌발행동 하지 말라고 하는 거거든요.

 

항상 비판해왔던 TBS, 이번 MBC, 그 이전까지 하면 JTBC의 손석희 등 탄압하거나 탄압을 시도하거나, 공격하고 영향력 행사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이후 하지도 않았던 언론탄압 했다고 욕 먹는 문재인 정권이 아니고 무식하고 근본 없는 검찰 공화국 윤석열 정권에선 실제 행동으로 언론탄압이 나타난 것 뿐입니다.

 

 

근데 이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언론 탄압이 아니라고 한다거나,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거나, 아예 정권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민주주의에 적합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이번 정권에서 실제로 후퇴하고 있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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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몸을 망칩니다. 가볍게 컨디션이 안 좋은 것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병은 치료되어야할 것이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 그만큼 건강도 안 좋아져 끝끝내 죽거나 죽음을 갈망하는 고통 속에 살게 되죠.

 

사회에도 질병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유는 더 안전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함이죠. 다시 말해, 지속 가능한 발전, 혹은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부정부패는 그 구성을 구조적인 맥락에서 형해화시키고 무력화시킵니다. 부정부패가 너무 심각한 사회는 반드시 붕괴할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이거나 혁명.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 역사가 말해온 예시들이죠.

 

 

후진국은 대부분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 관성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사회입니다. 그들은 20세기 초중반부터 근대화를 시작한 경우가 많고, 그 근대는 200~400년의 역사적 경험을 거쳐 현대에 도달한 서구와 다르게 길어봤자 100년 정도에 불과하죠.

 

한 세대의 세계관은 그 시대 내에서 변혁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맞는 세계관을 갖추기 마련이고, 이 시대가 지나가면 그들 중 일부만이 새로운 시대에 어느 정도 적응할 뿐 대부분의 세대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대에 다음 세대만큼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년이라는 시간에서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전근대적 세계관의 관성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조부 세대), 혹은 그들의 자식 세대는 현 세대의 부모 세대이고,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 역시 현 세대보다 더 전근대적 관성이 남아 있는 후진적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전근대 사회는 정치, 제도, 행정 등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기 전 전통적 사회에 가까웠기 때문에 중앙집권과 문명의 역사가 긴 국가, 이를테면 한국, 중국, 일본, 이란, 터키 등의 국가라 하더라도 근대와 전근대의 간극을 쉽게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역사적 경험과 기반이 있기에 근대로 접어들기 수월한 면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 현대 수준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회를 구성하기란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전근대 사회의 통치 수준에서 근현대 국가의 행정력과 치안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쉽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를 경험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부정부패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여 부정부패의 적발과 처벌이 더 쉬워진 시대에도 그 시대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범죄, 부정부패를 너무 가볍게 일으키곤 하죠.

 

 

문제는 이겁니다. 사회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라 전근대적 관성이 힘을 충분히 잃고 전근대 사회의 부정적 요소를 근대 이후에 접어든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끔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국의 발전 속도는 분명 경이로웠고 성공적이었지만, 문제는 전근대적 관성이 지금에까지 뿌리내려 그 악성 현상을 보편화시키는데에도 경이적이고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국은 45년 이후에도, 50년대에도, 60년대에도 부정부패가 많았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도 말할 것이 없고 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2010년대, 그리고 지금 2020년대에까지 부정부패가 많습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 분명히 부정부패는 줄어들었고, 그렇게 부정부패를 줄여오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성을 잡고 실천해나갔기 때문에, 아직도 분명히 모자라긴 하지만, 우리는 동남아 국가나 필리핀처럼 발전이 정체되고 성장이 멈출 정도로 부정부패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발목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창 성장하던 경제개발기에 발생하지 않은 일이고, 오히려 한국 경제가 발목을 잡힌 것은 그 이후, 지금 시대라고 봐야합니다.

 

 

분명 밑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줄어든 것이 맞습니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경찰들이 도로에서 뇌물을 받기도 하였고 여러 업종에서 크고 작은 횡령과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사회적 의식의 발전에 따른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가 있었고 행정 및 치안력의 발전에 따라 법적 제재가 더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극적일 정도의 변화가 있진 않았습니다. 엘리트 카르텔의 부정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하고, 단지 더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한 것 뿐입니다. 고도화된 것이죠. 더 높은 수준의 교육를 받은 이들이 더 복잡해진 자본주의 사회의 지도층으로 얻은 경험을 가지고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제도상의 헛점을 파해하면서 이전 시대의 부정부패와는 차원이 다르게 부패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더 큰 규모의 부정부패를 더 교묘하게 발생시키는 거죠. 차때기나 돈 봉투 대신 고급 정보를 제공하거나 은퇴 후 고연봉으로 고문, 법무팀, 이사 등으로 데려오는 식으로. 심지어 그마저도 여러번에 나눠서 돈을 얻을 수 있게 하거나 몇년 지나서 제공하는 식으로 증명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엘리트 카르텔에게 부정부패는 말단이나 중간 관리급 공무원이나 기업에서 부정부패가 줄어든 격차만큼 크게 줄어들지 않았죠. 훨씬 교묘하고, 훨씬 비밀스러워진 그들의 내부거래와 뒷거래는 언론에 공개된 것 이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관성이 남아 부정부패에 익숙하고 당연시 여기던 세대가 그 전근대적 관성을 잃지 않은 채 그 관성을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넘기고 그들 중 대부분이 엘리트 카르텔. 다시 말해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사회지도층이라는 점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부정부패는 사회적 질병인데, 그 질병을 치료하기도 전에 사회적 질서로 뿌리내려 버렸다고요.

 

문제는 이렇게 사회적 질서로 뿌리내리게 된 이후부터는 그 치료가 극히 어렵다는 겁니다. 그 사회적 질서(부패)를 통해 이익을 얻고 특혜를 보는 엘리트 카르텔의 반발이 엄청나기 때문이고, 그 힘은 일개 정치인이나 대통령, 정권 단위에서조차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정부패를 사회적 질서로 만들고 거기에 기생하며 성장동력과 발전여력을 빨아먹게 된 이상 한국의 발전은 다른 질서가 경쟁력을 갖추거나 새롭게 대체하기 전까지 동남아의 후진국처럼 부정부패에 의해 성장이 저해되고 발목이 잡힐 겁니다.

 

그리고 엘리트 카르텔에 의해 유지된 사회적 질서는 지배적인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이들, 그들의 힘과 영향력을 동경하는 이들, 그러한 질서를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여기게된 이들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이는 대중 계층에서 상당히 줄어든 부정부패가 다시금 확산될 여지를 암시합니다.

 

그 근간은 바로 계층이동이 경직되고 기존 도덕과 윤리규범이 도전받으며 엘리트 카르텔 역시 산업기의 활발한 변화가 있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상당히 안정화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전 시대와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노력과 성과만으로 성공해서 계층이동이 쉬운 시대가 아니지만 여전히 성공하고 싶은 이들은 더 이상 정직한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부정한 방식으로라도 성공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이들은 그저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며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만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고려말, 조선말과 유사한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부패에 발전이 발목잡힌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의 후진국은 그 형태와 구성만 다를 뿐 부정부패라는 형식은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한국의 차이는 개발기에 발생했느냐, 그 개발기를 넘은 이후에 발생했느냐의 시간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 경제발전에 대한 강력한 열망, 구조적으로 활발했던 계층이동과 탈락, 민주화와 독재라는 체제상 이념적 충돌이 오랜 시간 동안 주요 의제를 장악했다는 점에 의했을 가능성을 추정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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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ketchfab.com/

 

Sketchfab - The best 3D viewer on the web

With a community of over one million creators, we are the world’s largest platform to publish, share, and discover 3D content on web, mobile, AR, and VR.

sketchfab.com

 

 

스캐치팹은 3D 모델링 거래 사이트인 동시에 자기 작업물을 포트폴리오로 공개하기 적합한 사이트입니다.

 

가장 좋은 점은 모델링을 올려놓으면 사이트 내부에서 렌더링된 작품을 바로 3D 환경에서 움직여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는 거고, 애니메이션과 사운드 역시 적용 가능합니다. 3D 셋팅에 들어가면 유니티에서 포스트 프로세싱(후처리) 효과를 적용하는 것처럼 여러 효과들을 적용하여 더 높은 품질로 보여줄 수 있고 사용한 맵을 종류별로 확인할 수 있으며 와이어프레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https://help.sketchfab.com/hc/en-us/articles/115004259063-Selling-your-3D-Models

 

판매를 위해선 위 링크로 들어가서 Apply for a Seller Account를 누른 뒤 필요한 정보를 기입해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몇가지 알아야할 것이 있는데, 별 건 아닙니다. 위 링크에서도 소개되어 있듯이 자기 모델링 올려야 한다는 거고 썸네일과 제목, 설명이 판매하는 모델링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느냐 정도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때로 카테고리를 잘못 사용할 경우 스캐치팹에서 다른 카테고리로 변경해주고 관련 메일 보내는 경우도 있고요.

 

 

First name : 성

Last name : 이름

Email address : 메일 주소

Link to your Sketchfab profile : 자기 스캐치팹 프로필 주소

 

 

 

Country of business : 국적. 정확히는 사업 중인 나라를 말하는 거긴 하지만 그냥 사는 나라로 이해해도 됩니다.

Other Platforms : 다른 포폴, 작품 올려놓은 곳 있으면 링크 올려도 됩니다. 없으면 무시 가능.

Comments : 자기가 스캐치팹에 올린 모델링이나 모델 컬렉션 링크로 답변하변 됩니다.

 

내용은 대충 판매할 모델링이나 모델 컬렉션에 대한 링크를 주면 검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답변으로 추가 설명을 할 수도 있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항목에는 어떤 글자로 쓰면 안 됩니다.
 
이후 제출을 누르고 심사를 기다리면 되는데, 페이팔 링크를 연동해줘야 합니다.
 
스캐치팹은 페이팔과 연동이 되는 사이트이고 사이트 내에서 개별적으로 송금이나 환전을 해주지 않습니다. 물론 페이팔 계정도 필요하고 그렇게 연결을 시켜주고 모델링이 판매가 되었을 때 페이팔 계정으로 돈이 들어오는 거죠.
 
 
관련 정보 역시 위에 올린 Selling-your-3D-Models 링크로 들어가면 하단에 나옵니다. 
 
 
스캐치팹은 판매, 계정 연동, 수수료 등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는 편인데, 기본적으로 수수료는 12%를 가져갑니다. 원래 21년 7월 21일 이전에는 30%였는데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특별 이벤트 기간 때 0%가 된다고도 하는군요.
 
설명에 따르면 페이팔 수수료도 공제되고, 정확한 금액은 사는 곳에 따라 다른데, 미국 내에서 판매하면 2.7% + 30센트고 미국 이외 지역에서 판매할 경우 4.2% + n 센트 정도가 나간다고 합니다.
 
미국 내에서 100달러의 모델을 판매할 경우 스캐치팹 12달러(100달러의 12%), 페이팔은 3달러(100달러의 2.7% + 0.30달러)를 받아서 최종적으로 내 페이팔 계좌로 들어오는 금액은 85달러가 됩니다.
 
단, 미국 외 지역에서 판매하는 경우 스캐치팹 12%에 페이팔 수수료 4.2% + n센트가 적용되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5달러 정도 수수료를 페이팔 쪽에서 가져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국 내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약 2달러 손해를 보는 셈이죠.

 

그런 수수료 때문에 스캐치팹은 3.99달러 밑으로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 CGTrader가 2달러 밑으로는 판매할 수 없는 것과 다르죠.

 

My Sales 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판매 정보들이 나옵니다. 

 

 

 

따로 외주 작업으로 받은 거, 해외 결제를 위해 사용한 금액이 있어서 위 스캐치팹 판매 수익과 다르게 나오지만, 페이팔 들어가보면 대충 돈 들어온 게 이렇게 나옵니다.

 

참고로 페이팔에서 한국 계좌로 송금할 경우 위와 같은 조건과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일단 계속 모델링 판매하면서 올려놓고, 그렇게 올려만 놓으면 한달에 몇 달러 정도라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으니 용돈 벌만 합니다. 기본적으로 달러로 들어오는 것도 있어서 환전시 대충 환율만큼 차익을 벌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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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gtrader.com/

 

CGTrader - 3D Model Store

Join the fastest-growing 3D model marketplace today!

www.cgtrader.com

 

CG트레이더는 해외 3D 모델링 판매/구매 사이트인데, 가입 자체도 쉽고 인증 받기도 쉽습니다.

 

작성해야하는 건 별로 없습니다. 성, 이름,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국가, 지역(도시), 상세 주소가 필요하며, 은행은 자기가 이용하는 은행을 쓰는데 SWIFT 코드는 검색만 해봐도 바로 나오니까 그거 찾아서 복붙해주시면 됩니다.

 

 

아마 200달러인가 기준으로 환전, 송금해서 계좌로 보내줍니다. 매달 한번씩 원말에 송금해주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당연히 소액 송금해주진 않습니다.

 

스케치팹과 함께 소소하게 용돈 버는데 스캐치팹보다 규모가 큰 건지 사이트 이용에 다소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수익 쪽으로는 이게 생각보다 꽤 괜찮네요. 250달러, 200달러씩 2번 송금 받았습니다. 약 45만원인데 환율 고려하면 약 50만원 근처까지 받았네요.

 

참고로 제목이나 설명은 무조건 영어로 써야하고 특수문자도 대부분 사용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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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라이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단 라이팅 셋팅에서 New Lighting Settings를 눌러줘서 라이트 세팅을 하나 만들어줍니다. 그럼 아래처럼 기능들을 건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리얼타임 라이팅을 켜주거나 앰비언트 오클루전을 켜준다던가 사소한 조정이 가능한데, 중요한 건 이 부분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환경(Environment)로 들어가서 Environment Lighting의 인텐시티 멀티플라이 항목에서 수치를 줄여줍니다.

 

 

0.3으로 내려주면 빛도 약해지지만 동시에 그림자도 매우 진하게 변하죠. 근데 전체적으로 어두워져서 여기서 빛은 더 강하게 하고 싶다면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디렉셔널 라이트의 인텐시티 값을 높혀서 광량 자체를 높혀주는 거고, 기본 스카이박스라 조절 불가능하기에 스샷은 딱히 없지만 라이트 하위 항목인 Environment의 스카이박스 메터리얼, 혹은 그 스카이가 적용된 메터리얼을 찾아서 광 수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런 과한 그림자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나 연출을 주고 싶을 경우, 그런 묘사가 필요한 경우 적절한 수치를 잡아서 조절해 결과물을 뽑아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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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URP 버전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2019버전의 경우 포스트 프로세싱 기능은 포스트 프로세싱-볼륨에서 AO를 적용 및 조절 가능했지만 21버전에서 AO를 적용 및 조절하기 위해선 Window-Rendering-Lighting에서 AO 항목을 켜주고 다른 곳에서 조절해야 합니다.

 

폴더 중 Settings에 들어가면 URP-HighFidelityRenderer에 보면 SSAO가 켜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텐시티나 레디어스 등의 수치를 조절하거나 다른 항목들을 변경하면서 AO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SSAO 기본값.

 

 

인텐시티 수치를 (좀 많이) 조절한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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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URP 버전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2020버전은 잘 모르겠는데, 2019버전에서는 그 이후 버전과 좀 다릅니다. 19버전에선 포스트 프로세싱 볼륨을 생성해야 하고, 그 내부 기능도 이후 버전과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엠비언트 오클루전은 2019버전의 경우 포스트 프로세싱 볼륨에서 적용 가능하고 옵션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만, (아마) 2020버전 이후로는 AO 기능은 Window - Rendering - Lighting에서 기능을 찾아볼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옵션과 효과의 폭 역시 좁은 편이죠.

 

2021 URP에서는 글로벌 볼륨으로 명칭이 달라졌고 역시 그 세부기능 또한 변경된 것들이 있습니다.

 

포스트 프로세싱 기능은 볼륨에서 글로벌 볼륨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먼저 프로필에서 New를 눌러서 볼륨 프로필을 하나 만들어줍니다. 이는 해당 볼륨에 적용되는 기능을 저장하는 것이고, 여러개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효과와 옵션을 적용한 뒤 비교하거나 바꿔줄 수 있습니다. A라는 볼륨 프로필에선 블룸 효과가 적용되었는데 B 볼륨 프로필에는 블룸 효과를 적용하지 않은 셋팅을 둘 수 있죠.

 

물론 동시에 프로필 두개를 적용하는 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기능들이 있습니다. 2019버전에선 Ambient Occulusion이 있었지만 21버전에서는 없죠. 참고로 AO 조절은 라이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기능들인데, 이런 기능은 유니티 매뉴얼을 찾아보아도 좋고 직접 적용해보면서 어떤 기능이고 어떻게 옵션을 조절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확인해봐도 좋습니다.

 

전 톤 맵핑에서 ACES를 적용하는 걸 좋아하는데, 색감이 훨씬 내리눌러지게 나오죠. 물론 다른 옵션들도 조절해서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적용했을 때 색감이 안 좋게 나오거나 원하는 식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하나 조절해주거나 아니면 ACES 효과를 안 써야죠.

 

참고로 톤 맵핑 기능은 fog 적용에도 영향을 줍니다. 제가 ACES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글로벌 볼륨 적용 전.

 

 

 

적용 후.

 

 

아래 쪽이 좀 더 꾹 내리눌러진 색감과 명암, 분위기를 가지지만 이건 라이팅의 환경(Environment)에서 인텐시티를 조절해주거나 디렉셔널 라이트에서 인텐시티 등 옵션들을 조정해주면서 보기 좋고 현실적인 밸런스를 찾아가줘야 합니다. 위 사진은 그런 조절 없이 단순히 포스트 프로세싱 효과를 켜서 적용만 시켜준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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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에셋들이 있다고 치면 해당 모델링을 구성하는 오브젝트의 사이에서 없는 틈이 있는 것처럼 빛이 작게 통과되는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틈이 없이 닫혀 있다고 해도 모델링 자체가, 가령 3DsMax 상에서 오브젝트에 Shell 기능을 적용하는 식으로 면에 두께를 주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저런 접합 부분에 틈이 있는 것처럼 연산이 됩니다. 

 

 

이는 메쉬 렌더러에서 캐스트 쉐도우 부분을 건드리는 것츠로 해결 가능합니다. 해당 현상이 한쪽 면만 연산이 되기 때문에 빛을 한쪽 면이 아니라 양쪽 면에 막히도록(마치 두께를 준 것과 유사하게) Two Sided로 바꾸면 해결됩니다.

 

 

단, 이는 에셋 단위로 직접 바꿔줘야하기 때문에 엔진에 올려놓은 에셋이 많으면 많을수록 손이 많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해당 기능을 체크해놓고 에셋을 Copy, Paste 해주면 해당 기능이 체크된 상태로 복붙이 되니 미리미리 확인해주고 체크해주는 게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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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근대식 언론이 시작된 것은 구한말 대한제국-일제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경쟁하던 시기였고, 식민지배와 주권이라는 두 가치의 충돌이 있었던 때이기도 했으며, 내외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기도 했죠.

 

정치와 외교, 군사는 국가의 일이지만 언론은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기에 권력자들은 대중선전/통제 및 프레임 선점을 용이하게 해주는 언론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영향력 행사가 있어왔고 그 방식은 탄압과 처벌이라는 강경책과 돈을 입에 물려주고 내부자로 만들어주는 온건책으로 나뉘죠.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피지배민들이 일제에 순응하고 복종하길 바랬고 그걸 방해하는 민족지, 정론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 잘듣는 언론에겐 상을 주기도 했죠. 이후 전쟁 때에도, 이후 독재시절에도 언론은 권력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언론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언론의 역할을 수행해본 적 없는 선동창구였을 뿐이죠.

 

독재시기에 부당함에 저항하고 진실을 찾으며 비판을 할 줄 알았던 기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태시켰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도태지만, 그들 입장에선 아닐 도태로 인해 저널리즘을 할 줄 알고 그러한 가치를 이해하는 기자, 언론사는 그 힘을 잃어가고 말 잘 듣고 잘 통하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한국 주류 언론기조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죠.

 

 

독재 시절에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자주 썼고, 지금도 후진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을 죽이거나 '착하게' 만들지만 어느 정도 그러한 세태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보다 훨씬 잘 먹히는 방식을 씁니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돈을 물려주는 거죠.

 

사람 보내서 납치하고 고문하거나 협박하는 방식은 그러한 방식이 통할 수 있는 질서가 유지될 때나 가능한 방법이고, 그러한 방식은 제나름의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리스크를 무효화시키거나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한 체제에서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민주화와 같은 체제, 질서의 변화에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한 거고, 기존에 있었던, 튀는 놈이 아니라 말 잘 듣는 언론을 길들이고 우리편으로 만들었던 안정적인 방식을 확대하는 게 효율적인 방식이 되었죠. 당장 나가는 돈은 아까울 수 있지만 옛적 방식을 썼다 발각됐을 때 발생하는 리스크는, 그걸 덮기 위해 써야할 자본은 일개 개인에게 물려주는 돈에 비하면 푼돈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선점되는 개념에 따르는 면이 큽니다. 어떠한 방향성을 잡아주고 어떠한 개념 요소를 짚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흐름과 방향성, 그 판단의 중점이 되는 포인트가 잡히고 그렇게 흘러버리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을 장악하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는 건 민주주의 사회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프레임을 잡을 수 있고 선점할 수 있는 언론을 손에 넣는 건 권력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어떤 면에서는 거의 1순위에 가까울 일이라는 거고요.

 

그렇다고 언론이 정치권력보다 더 강하거나, 언론이 정치인과 정당에게 갑의 위치에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언론들 말처럼 우리가 정권을 만드네 어쩌네 하는 건 선거철 때 이야기고, 선거가 끝나면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지는 것처럼 언론 역시 그에 굽힐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누구 손에 있느냐는 권력의 정당성과 실질적 활용 범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유이고, 언론과 재계의 힘은 언제나 정치권력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죠.

 

 

그렇기에 언론은 권력자(정치, 경제 영역 모두)에게 밉보여선 안 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겁니다.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도 좋고 인맥이나 학벌로 이어지는 것도 좋죠. 민주주의에선 권력투쟁이 자본은 물론이고 법적 제도(선거 등)와 이미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법적 정당성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검찰 등 법 권력과 친해지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어떤 영역에서든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언론과 친해져서 나쁠 게 전혀 없고요. 정치인들은 자기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고 불리한 부분을 축소해줄 수 있으며, 적대 진영에 불리한 이미지를 형성시켜줄 수 있고 경제인들은 자기 기업과 제품에 돈으로 환산되는 인식을 주입해줄 수 있으며, 검찰은 정치, 경제권력과 붙어먹으며 기소하고 처벌할 대상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줄여줄 수 있게 마사지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언론은 어떻게 이익을 얻느냐, 정치인이 됐든 경제인이 됐든 검찰이 됐든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생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인맥관계를 맺고 그들과 인터뷰, 취재, 그마저도 아니라면 (폐쇄적인) 식사 자리에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주고 받는 겁니다. 이번에 어느 지역에 어떤 사업을 하게 되어서 땅값이 오를 거라든가, 이번에 기존 사업부 몇개를 접을 거니까 그쪽 관련 주식 빼놓으라던가, 누구누구 기소해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고 이런 정보를 너한테만 흘려줄테니 기사화시켜라. 하는 식으로.

 

옛날에는 이런 이권거래가 술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오가는 돈이었다면 지금은 증거 없는 정보를 전달해주며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에서 언론의 역할은 결코 주인은 될 수 없겠지만 권력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놈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을의 입장에는 있지만 힘 좀 쓰는 을의 입장에 가까울 겁니다. 언론사란 결국 기업이고 그들은 투자를 받아야하는데, 기업의 광고비는 매우 중요한 수익요소이고, 고급 정보를 먼저 접하거나 만들어내는 위치에 있는 이들, 엘리트와의 접점이 끊어져 인맥을 잃은 기자 개인의 중요성은 떨어져 쓸모가 없어집니다.

 

 

좀 더 큰 그림으로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언론은 탄생 순간부터 강력한 정치권력에게 통제, 탄압되었고 거기에 순종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권을 받았으며, 경제권력은 경제적 이유로 언론을 활용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돈, 혹은 돈이 되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언론을 길들였습니다.

 

언론은 그러한 이들과 담합하며 이익을 챙겼고 이건 언론과 기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관계였고요. 이러한 관계는 언론과 정, 재계라는 껍데기 때문에 특수해보일 뿐, 이권이 얽힌 업계간의 담합이라는 뻔하고 흔한 부패일 뿐입니다.

 

여기서 저널리즘은 소수의 언론인들이 추종하는 가치일 뿐이고, 때때로 언론 껀덕지를 하기 위해 몇몇 기자와 평론을 할 때나 등장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자본주의적 원칙보다 우선되지 않고 그것으로 명성을 쌓지도, 권위를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형성된 한국 언론 환경은 당연히 저널리즘이라는 게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서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민망할 정도로, 엄밀히 말해서 한국의 저널리즘은 민주화 이후 자본과 권력에 의해 적지 않게 해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때 보여주는 한국 언론과 타국 언론이 어느 쪽에 더 포커스를 맞추었느냐를 보았을 때 쉽게 판가름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사건을 정치화시키기 위해 청탁, 요구했을 때 언론은 자기 이익을 챙겨주는 이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겼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보상금이라는 돈으로 계산하려는 습성은 그들의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사건의 본질과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보단 돈이라는 자본을 더 우선시하는 가치관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해외 언론은 관심의 포커스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맞췄고, 돈보다 사람에 맞췄죠. 이것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세월호 당시 한국 언론이 보상금,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를 계산하고 있을 때 일본 언론에선 수온에 따라 생존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널리즘이 부재한 언론 환경에서 중요한 건 이익을 주고 받는 카르텔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 진실을 밝히고 본질을 파악하며, 그러한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언론)이 가진 강점(프레임 선점, 선동)을 스스로의 이익과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거죠.

 

 

저널리즘을 추종하고, 할 줄 알았던 언론사나 기자들은 역도태되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약한데 반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언론사, 기성 언론사들은 그들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다른 논조를 가질 뿐 기본적으로 엘리트 카르텔과 얽혀 있거나 그 자체로 엘리트 카르텔의 일부입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 만세를, 한국전쟁 때는 김일성 장군 만세를, 독재시기엔 박, 전 장군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하던 언론과 그 아류, 혹은 복제, 혹은 친인척인 언론들이 한국 언론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 한국의 언론 현실입니다. 그들은 힘의 논리와 그 힘에서 나오는 이익을 따르는 것이고 서구에서 이해되는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멉니다.

 

 

설령 저널리즘을 위해 비판성을 잃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든 따돌려지기 마련입니다. 직장에서 따돌려지고 한직으로 밀려나고 데스크에서 안 받아주고 수정 명령 내리고 때로는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수정해서 논조가 바뀐 채로 올라가기도 하죠. 취재를 하거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만나주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아무리 발로 뛰고 찾아가도 제대로된 기사를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해고가 되든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 없어지든 하게 되는 법이죠. 그렇게 살기 싫은 사람들은 애초에 돈 주는 주인님들 시키는데로 하거나 결국 굽히고 굴복하는 이들 역시 주인님이 물려준 돈의 달달함에 입을 다물고 시키는데로 하게 됩니다. 뭐든 한번이 어렵지 두번이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번 먹고 사는 게 어려워 좋게 좋게 달래주고 회유하는 과장님 말 듣고 한번 돈뭉치 입에 물어보면 다음엔 더 쉬워지죠.

 

삼성을 그렇게 비판했던 기자가 결국 이재용 가방 들어주는 건 언론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였고요. 그 양심을 저버리고 굴복했지만 여전히 떳떳하고는 싶어하는, 굴욕과 자존심이 충돌하는 복잡한 표정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개새끼짓을 하고 있어도 자기가 개새끼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건 표정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반대로 돈주는 쪽에 붙어서 돈벌겠다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기자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돈은 그 기자가 써주는 기사가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훨씬 적은 편이거든요. 이는 옛 시절보다 기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본의 폭이 커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언론을 장악해놓으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매리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투자는 결코 아까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 투자를 받는 기자와 언론사는 돈주는 물주들, 정보 제공해주는 이들에게 충성하는 거고 그들이 원하는 기자를 외주 받아 써주는 노동의 대가로 다양한 향응을 주고 받는 야합 관계가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향력과 힘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고,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자기가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자기들이 대단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기자들의 오만함과 허영심, 꼴 같잖은 자존심으로 표출되는데, 대표적으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에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지배층 내지는 그에 준하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렇습니다. 언론이 기득권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언론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지만 그 개개인은 언론사의 중역에 속하는 진짜 주인을 제외하면 그저 일벌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착각입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엘리트 카르텔을 유지하고 그에 속하여 충실하게 일해주는 원동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그 기득권의 유지 발전을 위한 충실한 행동력에 강력한 동인이 되어줍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경제인들이, 정치인들이 주는 크고 작은 이익들은 일개 기자 입장에서 너무나도 달달하죠.

 

이런 구조적인 조건 속에서 언론 환경은 저널리즘이 아닌 자본주의적 원칙에 충실한 사업이자 장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법과 도덕, 윤리와 같은 보편적이고 지배적이어야 할 원칙과 규칙보다 나와 남의 구분을 우선시하여 나와 내가 속하는 집단의 식구에겐 특혜와 이익을, 남과 남이 속한 집단에겐 차별과 불평등으로 작동하기에 언론 역시 법과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가치 기준보다 우리 식구와 남을 구분하는 것을 우선하고 그 구분에 따라 언론 권력을 행사합니다.

 

내게 돈 물려주고 정보 제공해주는 분들의 이권과 편의에 언론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언론 권력의 온도와 논조는 뚜렷하게, 때때로 교묘하게 차별적이죠. 결코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기준으로 작동하는 언론 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러한 저열한 언론의 태도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럴 여유도 없는 대중들에게 굉장한 효과를 낳고요.

 

그렇게 정의와 불의가 뒤집히고 법조 카르텔과 정치 정당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편적 원칙보다 개별적 사안으로 접근시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라고 인식시키며 사회적 갈등을 봉합시키거나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발생시키기도 하며 특정 책임집단에게서 책임을 형해화시키기도 하는 등 정의와 같은 가치는 물론 법적인 영역에서조차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이 한국 언론 지형입니다.

 

이러한 언론 환경은 식민지 시절부터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에 의해 형성되고 길들여진 것도 있지만 그것에 적응하고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던 기회주의자들이 그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그들에 반발한 언론과 기자들이 역도태되면서 만들어진 생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수십년이 지나 21세기가 되고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게 발달한 사회가 된 대한민국에서 기존 부패의 영역과 구조 역시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고도화되었고, 기득권과 언론의 영합, 야합으로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 역시 고도화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직접 돈봉투를 찔러주는 것보다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게 하고, 그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에 증인과 증언이 있다해도 아는 검사님과 몇다리 건너서 배정된 착한 판사님을 통해 얼마든지 무혐의, 운이 나빠봐야 집행유예를(그것도 다른 죄목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훨씬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부패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일소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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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구조적으로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기를 잃은지 오래고, 그건 우크라이나의 반격 때 사실상 결정된 거라고 봅니다. 이제와서 서방이 지원 끊는다고 러시아가 역전에 가능할 것도 아니고, 이미 러시아의 박살난 병력, 자원, 동원력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대부분의 요소가 망가졌고, 이걸 복구하려면 전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병사는 병사대로, 부사관은 부사관대로, 장교는 장교대로 망가진 군대라 전쟁 수행력은 사실상 병사 1인당 0.2인분 정도나 하면 그만일 정도입니다.

 

이에 푸틴과 그 주변놈들, 러시아 정부가 여전히 제정신을 못차려서 아직도 어떻게든 인간을 갈아넣고 한 세대, 아니. 몇 세대가 다 죽어나가도 전쟁만 이기면 되고 그렇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오판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이 전쟁이 질 거라는 건 알 겁니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결과이고 그건 이미 예정된 거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럼 그들이 해야할 이 뭐겠습니까?

 

전선에 보낸 병력들이 불만을 가진 채 본국으로 세력화되는 걸 막아야죠. 아무리 독재정권이고 지랄이고 전선과 전쟁의 현실을 경험한 이들이 불만이 없을 수가 없고, 군인에서 시민, 유권자로 돌아온 이들은 당연히 이 불만을 매개로 뭉칠 것이고 정권에 책임을 물을 겁니다.

 

패전한 정권은 그들의 책임추궁을 막을 방법이 없죠. 이미 군대도 박살났고 아무리 경찰 등 동원 물리력이 있다고 해도 살아돌아온 이들이 거기에 밀리거나 쉽게 진압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그들이 살아돌아오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사실 이런 생각 자체는 저번달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후퇴와 동시에 병력 다 죽든 말든 다리 끊어 버리는 거 보고 살짝 확신할 근거를 얻은 느낌입니다.

 

권력을 쥘 수만 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고 국민들이 어떻게 되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어떠한 희생이라도 강요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위정자들이며 병사들이 돌아와 정권을 상대로 공격하기 전에 그들을 최대한 희생시켜야한다 생각할 겁니다. 물론 전부 다 죽으라는 건 아니고, 그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줄여서요.

 

남은 여자들이 시위,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뿌리 깊은 러시아의 마초이즘과 집안에서 마누라 패는 게 익숙한 러시아인들이니 경찰 병력과 남은 군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할 자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쉽게 말해, 힘 쓰는 일은 남자가 하는 거지 여자가 일으키는 폭동은 때려패서 진압할 자신은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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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야기할 것은, 이 글은 경상도나 경상도민을 비하하거나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경상패권주의, 혹은 영남패권주의라 불리는 그것에 대한 비판과 그게 어떻게 아직도 남아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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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경상도 지역의 유사성이라 함은 그들이 특정 지역을 희생자로 삼아 착취를 해왔고, 그러한 제국주의적 착취를 기반으로 패권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왔다는 겁니다.

 

일본의 경우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지적 우위를 기반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며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자국의 유지와 발전, 전쟁 수행에 투입했었죠. 비록 일본의 군국주의가 지속 가능한 체제는 아니었지만 식민지에서 착취한 자원들이 일본제국에 큰 역할을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경상패권주의, 혹은 영남패권주의의 형성과 유지와 유사한 면도 있습니다. 가령, 군사적으로는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정권이라는 국가적 권력의 실제적 총체를 장악했다는 점,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겐 군-검-경-안기부의 무력과 법적, 정보적 우위의 독점 체제를 통해 얼마든지 솎아낼 수 있었죠. 정권을 장악한 독재정권이었기에 국가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고 지역주의 감성에 의해 국가 요직을 특정 지역 출신에게 몰아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경쟁 지역, 그리고 선거 당시에서 꾸준히 위협적이었던 김대중의 호남 지역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줘야 했습니다. 호남 지역에 가야할 예산을 경상도 지역에 호혜적으로 전환했고 전라도 출신에 대한 차별을 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경상도 출신 사회지도층이 서울경기를 제외한 다른 지역보다 비율적으로도 많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경상도 지역 인구를 감안해도 정말 많은 경상도 출신들이 인맥이라는 사회적 관계망과 우리가 남이가 감성을 대표로 하여 많은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곤 합니다.

 

요는, 군사적 우위와 정치적 독점을 통해 특정 지역(조선-전라도)의 자원을 착취하여 특정 지역(일본-경상도)에 집중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정 지역 출신(일본-경상도)에게 특별히 더 많은 특혜를 부여했고요.

 

 

근데 이러한 착취적 패권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단 한번 끝났고, 한국은 86년 이후 일단 한번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전쟁 이후 동아시아 지역패권 경쟁에서 한 급수 밀리는 대신 오히려 체급을 크게 키워버리는 혜택을 얻었습니다. 물론 6.25 전쟁이 없었다고 일본을 농업국가화 시킨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전쟁이 일본에게 어마어마한 이익을 안겨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덕분에 60~90년대 언저리까지 어마어마한 경제성장과 그 이상의 거품경제를 기반으로 엄청난 국력과 위상을 얻어냈었죠. 그러나 거품경제는 끝났고 잃어버린 n0년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영광을 잊지 못한 이들은 자국의 우월성 입증에 천착하여 극우주의, 역사수정주의 등 다양한 입장으로 드러나고 있죠.

 

이들은 2차 한국전쟁을 일본의 재도약을 위한 기회로 간주하고 있고 여전히 한국을 일본에 종속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마우지 경제는 그러한 목표를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었죠.

 

 

한국 극우세력, 그 중에서도 영남패권주의자들에게 60~80년대 독재 체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였습니다. 특정 지역을 착취하며 얻어낸 자원의 집중은 질적 풍요를 늘렸고 전근대적 감성과 지역주의적 정서는 같은 경상도인에 대한 끈끈한 유대와 연대를 이전 시대보다 더 고도화된 방식으로 표출시킬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즉, 더 많은 자원이 배당되었기에 더 높은 교육을 시도해볼 수 있고,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은 더 많은 고위직과 핵심직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부터 지역 및 국가 요직에 동문, 인맥 등 경상도 출신이 임명되고 그러한 위치를 장악하게 되면서 자기 출신 지역에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배당할 권한 역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기 후임으로 인맥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연결망으로 알게 된 같은 지역 출신을 올리거나 남에게 소개할 수도 있었고요. 예컨데 자기 고등학교 동문, 후배를 자기 라인으로 초대하여 밀어주고 올려준다거나.

 

이렇게 경상도 출신은 타 지역에 비해 더 손쉽고 빠르게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더 많은 자원을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울은 예외고요. 그 중 가장 많은 차별과 착취를 당한 건 호남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86년도 이후 민주화가 되면서 일단은 영남패권주의가 한번 깨지게 됩니다. 이제 민주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제왕적 대통령제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영남패권주의는 그대로 끝장난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패전 이후로 동아시아 지역 내 위상과 국력을 전부 잃어버린 게 아니고 거품경제가 끝난 이후에도 일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편이라는 걸 생각하면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것처럼 이들이 패권을 장악했던 핵심 원리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패권을 누렸던 역사적 경험과 그 핵심 원리는 관성처럼 남아 그들의 정신적 세계관 및 정서에 여전히 기능하고 있고요.

 

일본인들에게 극우주의, 역사수정주의로 그것이 드러났듯이 경상도인에게도 극우주의, 역사수정주의로 드러납니다.

 

일본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력으로 영광의 잔재를 유지하고 힘을 구사하고 있고, 경상도는 인적 카르텔과 독재시절(혹은 그 이전)의 사상적 기반으로 그 시절 그것의 관성이 남아 있는 겁니다. 

 

실제로도 현재 경상도는 전라도보다 배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고 경상도 출신 상경자들 역시 많으며, 그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형성해온 사회적 분위기, 혹은 지배적 원리로서의 사상이 강요되었기에 타 지역민조차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단, 상경자나 이주자의 경우 호남 쪽 역시 오래전부터 인구 유출이 이루어졌기에 많았지만 이들은 고향이 호남과의 연결이 경상도 출신 상경자에 비해 끈끈하지 않은 편이고 그 지위 역시(대개의 상경자들과 비슷하게, 그러나 독재 정권 당시의 인식에 의해 조금 더) 낮은 편이었습니다. 그런 위치와 상황에서 고향과의 연대 및 연결은 더더욱 어려운 편이었죠.

 

 

한국은 식민지 이후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식민지 당시의 것들을 부정해야했습니다. 거기에 이어진 6.25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사상적, 세계관적 충격을 가져왔고, 새롭게 재편된 한국인들의 정체성과 사회구조는 식민지 시절과의 어떠한 단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일제의 가치는 극우보수를 통해 이어졌고 그들이 이승만에 의해, 그리고 개신교회를 통해 살아남고 이어져왔으며 권력자 등 사회지도층 지분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단절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친일파의 생존원리를 담고 있는 한국극우의 사상은 극우보수에 근접하는 지분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해도 진보좌파, 혹은 그에 가까운 사상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그 당시 그것들에 대한 부정과 단절은 요구되었고 더욱 새로운, 현대적 가치들을 요구해왔죠.

 

 

그렇게 현대적 가치를 요구하는 진보좌파와 독재 당시의 가치를 여전히 추구하는 극우보수라는 문법으로 양분화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좌파는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요구하지만 극우보수는 독재 당시의 사상/세계관의 관성에 의해 작동하는 진영이라는 거죠.

 

즉, 진보좌파에게 한국은 산업시대의 그것에서 벗어나 21세기 현대사회가 된, 혹은 되어야 하는 한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를 질문한다면 극우보수는 과거의 관성에 그대로 남아 그 당시의 패권에 여전히 향수를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남패권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물론 모든 경상도 사람이 영남패권주의를 지지하거나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극우보수적 가치와 세계관에 잠식된 좀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당시의 가치를 지배적 사상으로 하여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자 하는 이들과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 역시 많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진보좌파, 특히 호남 지역은 5.18이라는 충격과 그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쳐 극우보수에 대해 강력한 반동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6월 항쟁 이후 민주화된 사회는 기존과 반드시 달라져야 합니다. 이들은 어떠한 이유로든 영남패권이 장악하고 호남을 차별/착취하던 시대와의 단절 및 결별을 요구할 수밖에 없죠. 어떠한 면에선, 새로운(그리고 더 나은) 체제를 요구하는 겁니다.

 

반대로 극우보수는 독재정권에 의해 받은 특혜를 가장 좋았던 시대이자 가장 자부심을 느낄 법한 시대로, 실제로 인적 카르텔을 기반으로 성공하거나 국가 권력의 요직에 접근하기 쉬웠던 환경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그 시대 그 시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그러한 원리로 작동하는 엘리트 카르텔은 단지 영남패권주의로만 한정되지 않았을 뿐, 그러한 영남패권주의가 아예 사멸하거나 도태된 것도 아니고요. 그저 지분이 축소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호남이 진보좌파, 좀 더 노골적으로는 친민주당 스탠스를 가진 이유는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영남패권주의와 각종 차별, 멸시, 실제 피로 쌓아온 혈채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 시대의 정체성을 가진 보수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호남은 산업시대, 좀 더 정확하게는 독재시절 그것에서 결별을 요구하고 추구하는 정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치에게 당했던 이들이 독일(혹은 비슷한, 특히 강한 국력을 지닌 타국이라도)의 네오나치화를 경계하고 비판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과 반대 정서와 이념에 반강제적으로 속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요.

 

경상도 지역은(물론 모든 경상도인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 시절을 리즈 시절로 생각하기에, 그 시대와의 결별은 이단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정체성의 위협입니다. 오히려 그 시절과의 결별과 단절은커녕 그 시절 그것의 관성에 여전히 남아서 작동하는 사회에 가깝습니다.

 

 

일본이 가깝게는 거품경제, 멀게는 제국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시절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이 결별되거나 단절되어야할 기회나 요구가 이미 그들이 장악한 권력의 독점을 통해 강제로 묵살되었던 것처럼 한국 역시 식민지 친일파와 산업-독재시절의 정체성이 결별되지 않았고 단절되어야할 기회나 요구 역시 극우보수가 장악한 권력의 독점과 엘리트 카르텔을 위시로 하여 강제로 묵살되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성으로 여겨져야 마땅한 정체성은 그 반대 세력이 추구하는 바와 다르게, 그리고 그 반대 세력들이 저항하고자 했던 극우보수 독재 추종 세력의 반대 위치에서 반동적으로 가지게 된 사상적 입장과 다르게 여전히 관성적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 극우보수 세력이 민주사회의 시민보다 중세 신민에 더 가까운 이유는 그들의 정서와 세계관이 현대사회보다 전근대적 원리와 감성, 정서가 남아 있던 시절의 그것에서 발전할 이유가 없었고, 단절되거나 결별할 이유 역시 없었으며, 오히려 그 당시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유리하고 이상적인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극우들이 그러하듯이.

 

이들에게 작동하는 원리는 법과 도덕을 근거로 하는 객관적 공정과 정의, 평등의 가치가 아니라 나와 남의 구분을 기준으로 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차별과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이익과 손해에 있습니다. 내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외집단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정한 기준을 무시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 한정된 자원을 몰아주며, 때때로 불법이나 탈법의 방식을 사용하여 내집단의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내집단의 구성원이 범죄나 비윤리적 방식으로 비판을 받을 때 그것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내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호해주는 식으로요.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정체성보다 지역 정체성이 더 우선하고, 부족 사회 내지는 전근대적 고립사회에 가까운 연결망 유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최소한, 그들의 지역 정체성은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하고 국가 정체성보다 우선시되는 면도 있습니다. 같은 부족, 같은 마을, 같은 고을을 내집단으로 여기고 거리야 어찌됐든 심리적 연대감이 부족한 다른 부족, 다른 마을, 다른 고을을 외집단으로 여기며 그러한 집단간 차별의식을 기반으로 이익과 보호를 추구했다는 거죠.

 

이것은 대한민국의 보편적 원리를 장악해야할 당위가 있는 가장 강력한 규범인 법과 그것을 보조하여 사회를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현대적 도덕, 윤리 기준보다 전근대적인 원리가 먼저 작동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특정 지역에선 다른 지역보다 더 우선되고 더 높은 지분을 가진 채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서술했던 역사적 이유가 관성적으로 남아 결별, 단절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심지어 그러한 사상과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국내 인구 절반 가까이 장악하고 있고, 국가 권력의 핵심 위치와 사회적 지도층 다수를 차지하고 끈끈하게 유대/연대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테고요.

 

그들이 기득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이권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자들을 적으로 삼아 도태시키려 하며, 그러한 시도가 성공한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더 나아질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습니다.

 

지배층은 그 위치에서 존재만으로 지배적 원리를 하위 계층에게 강요하게 되고 그러한 원리와 사상을 받아들이고 동의한 이들만이 지배 카르텔의 허락을 받아 도태되고 밀려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극우보수가 여전히 사회지도층, 국가 권력의 핵심 기득권을 지배 및 장악하고 있다면 그것에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그러한 카르텔을 도태시킬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는 문재인 정권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고 민주적 방식으로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민주당이 제시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정말 정의롭고 훌륭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했다면, 최소한 그 반대 세력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면 윤석열 정권이 나와선 안 됩니다.

 

그러나 실제 시민들은,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과반수는 문재인 정부가 아닌 기존 극우보수 세력의 지배원리와 사상, 정체성을 선택했습니다. 실제 민주당과 진보좌파가 차지한 자리보다 국힘당과 가까운 극우보수가 장악한 기득권 자리가 더 많고 그들의 지배원리가 성공과 출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성공과 출세의 원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것만이 정권 유지 실패의 원인이거나 원인의 전부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른 관점과 방향성에서의 해석, 접근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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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도발을 쭉 해봤는데, 이번 정권은 개호구라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이게 너무 가볍게 들린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윤석열 정권은 북한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지침과 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그에 대한 무력적 반격 내지는 반응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 아니. 아예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조차 내린 적이 없기에 지금껏 해왔던 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도발 역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견적이 나왔다는 겁니다.

 

이미 취임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을 때 무력 도발을 해왔습니다. 이건 정권 바뀔 때마다 그 정권의 대응 수준과 기조를 알아보기 위한 연례행사나 다름 없다보니 특별할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근데 윤석열 정권은 북한으로서도 당혹스러웠을 행동을 하고 맙니다. 퇴근 이후에 탄도미사일을 쐈더니, 대통령이 재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북한에게 아주 중요한 시그널로 작용한 건데, 당시에도 관련 글에서 언급했듯이 한국 정부는 북한의 무력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과 특히 대통령 퇴근 이후가 아주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약점 시간대가 된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술마시느라든 다시 출근하기 귀찮아사든 칼퇴근 이후 북한이 한국에 기습공격을 가하면 반드시 한국 정부의 대응은 한박자, 아니. 두박자 느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북한에 내어준 안보공백으로 정리되는 문장이죠.

 

사실상 위력정찰이나 다름 없는 도발이었는데 거기서 전략적 취약점을 발견했으니 북한으로서는, 특히 북한 수뇌부 입장에서는 생각지못한 성과가 된 겁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번 북한은 도발을 했는데 한국의 대응은 수준 이하였습니다. 최소한 친중친북이라 욕먹었던 문재인 정권보다도 하수였죠. 따라서 북한은 이러한 한국 정부의 대응 수준과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고, 분석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정교하게 계산된 도발로 이번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겁니다.

 

이게 한국에 대한 아주 중대하고 위험한 도발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단순히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게 아니라.

 

1.대개 전략적으로 운용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점.

2.그 방향이 지금껏 한번도 선택된 적 없는 경로라는 점.

3.그 위치가 처음으로 NLL을 넘어 한국 영해였다는 점.

4.초기 방향이 섬이기 때문에 대응하기 어려운, 그러나 적지 않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울릉도였다는 점.

 

좀 더 추가하자면

 

5.울릉도엔 제대로된 방어시설이나 대피시설이 없기 때문에 공격 성공시 상당한 인명피해를 기대할 수 있고,

6.이후 한국 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구호 및 구조 활동에 들어가야하기에 반격과 별개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해져 있다는 것.

 

 

이건 사실상 인명피해만 없을 뿐 연평도 포격 사건과 거의 동급에 가까운 수준의 도발입니다. 평소와 같은 무력시위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거고, 그만큼 한국 정부의 대북 위기대응 능력을 낮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주 불행스럽게도, 북한의 계산은 꽤 정확했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대응이 심히 수준 떨어졌거든요. 꼴랑 이북 방면으로 포 조금 쏘고 단호한 대응이라고 한다면 체면치레도 못한 거거든요. 그 단호한 대응은 취임 초기 퇴근 이후 도발 했을 때 그런 대응을 했어야 했습니다. 초기 대응이 이후 북한의 도발 수위를 결정할 수 있고 이후로 북한이 도발을 할 때마다 대응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북한의 도발 수위를 컨트롤할 수 있었어야 했어요.

 

근데 취임 3일 첫 도발 때부터 지금까지 윤 정권은 그걸 실패해왔습니다.

 

그러니 이런 심각한 무력도발을 실행한 거고 그 실행이 성공한 겁니다. 대선 당시 선제공격론을 주장한 것은 개돼지들에게 표를 받기 위한 거짓말이었고 실제 윤 정부의 대응 수준은 굴욕적일 정도로 처참했으니까요.

 

북한은 이번 도발의 성공을 통해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비슷한 수위의 도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장은 아닐 거고, 자주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런 수준의 도발이 전례가 된다면 더 높은 수위 역시도 가능성을 볼 거고, 그만한 수위의 도발에도 윤 정부는 강경대응하지 않을 것이지만 크게 얻어낸 성과는 오래 우려먹어야 하기 때문에요.

 

 

대북 강경대응을 원해서 윤석열 정부를 찍었던 사람들은 뒤통수가 얼얼해야 정상입니다. 북한 개새끼! 하고 말 게 아니라요. 근데 대가리가 덜 깨진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뒤통수를 쳐맞아도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참 심각하긴 합니다.

 

 

북한은 도발수위의 기준선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한국 영해 내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해도 고작 이 정도 대응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으니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번 도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도발 역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으니까요.

 

현재 북한은 이번 도발의 성과를 치하하고 있을 거고, 그보다 좀 더 아래 실무에서 구르는 이들은 한국 정부의 대응과 이후 움직임에 대한 분석에 들어갈 겁니다. 이후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로드맵을 한번 더 짜봐야할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군사도발에 무력한 대응력을 보일 것이나 국내 분위기상 대북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경우 최소 한번 정도는 강경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유지될 시기에 북한이 잠잠히 나온다면 대응의 명분이 부족한 윤석열 정부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군사적 움직임에 나서지 못할 것이고 강경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금방 사그라들 것이며 충분히 시간이 지난 이후 다시 도발할 경우 윤석열 정부는 이전과 같이 소극적 대응에 그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번 도발을 반복하며 데이터를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한심한 대응 수준과 수위에 대해서 말이죠. 세상에, 취임 3일 째 탄도미사일 도발에 퇴근 했다고 재출근을 하지 않고 자국 영해 위에, 그것도 인구 8000명이 거주하는 섬 방향으로 탄도미사일이 날아가는데 꼴랑 포 쏘는 걸로 단호한 대응이라고 하는 정부라니.

 

북한 입장에선 내부결속을 위한 치트키나 다름 없어진 셈이죠.

 

이딴 게 세계 10위권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안보 수준이라니. 내가 찍은 대통령이 아니라지만 너무 수치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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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실제로 까마귀가 나는 것과 배가 떨어지는 것의 상관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현상이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다면, 혹은 관찰된다면 어떤 현상이 다른 현상에 선행하거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죠. 그러나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인과도 없다면 그것은 논리적 오류가 됩니다.

 

 

하나의 세계관은 한 사람의 삶으로 구축됩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경험에 따르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란 완전히 다른 삶의 경험으로 번역될 수 있죠.

 

한 국가의 환경은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발전과 시골의 발전도는 다를 수밖에 없고 상류층과 하층민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한 사회에도 여러 층위가 존재하듯 평균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보편적으로 겪을 수 있는 환경과 할 수 있는 경험에는 어느 정도 교집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서민과 비서민, 수도권 거주자와 지방 거주자의 관점 차이는 꽤 커다란 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리적 한계 내에서 그 경험의 폭이 좁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그 간극은 타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지리적 폭은 좁지만 시간적 폭이 넓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인데, 한 세대가 겪는 시대적 경험과 그 다음 세대가 겪은 시대적 경험의 차이는 한 세대 이상의 것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4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과 6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 80년대와 2000년대를 20대로 보냈던 사람에게 한국은 완전히 다른 국가였습니다.

 

사상적 차이가 아니라 물질 문명의 발달 정도가 한 세대 이상의 간격을 보여주며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물질적 경험은 사상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치고, 곧 세계관에도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한국의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던 이방인이며 우리 사회는 이방인들의 집합인 셈이죠.

 

 

진보와 보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그들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죠. 진보에게 정의인 것이 보수에겐 위선이 되고, 보수의 정의가 진보에겐 범죄로 인식되는 가치관의 차이는 상당한 간극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상식의 영역조차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고, 정반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합니다. 대체로 상식적인 판단력을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접어드는 순간 그들의 상식적 판단력은 진영간의 간극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작동하는 논리 회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그 회로에 작동하는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상에는 객관적으로 판단할만한 요소들이 존재하며 그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이 객관성, 혹은 상식의 보편적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난 경우라면 그 사람은 특별히 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이고, 비상식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는 세계관의 객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합리合理는 이치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숱한 문화권과 깊은 인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와 범위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가 그러합니다.

 

이는 나와 내 가족, 내 주변 사람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생명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옛적 시절부터 사람은 나와 남을 구분하여 남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않고 (내 주변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말미암은) 나의 아픔에 더 이입하였지만 그렇다하여 생명의 무게를 경시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은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는 체제에 무너져 도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에서 출발한 것들은 대체로 도덕, 윤리와 같은 전통적인 정신적 사상이 되었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관습적 질서로써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생명을 기준으로 하는 도덕률은 객관적 기준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악인의 죽음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거나 이입하기 어렵고, 그들에게 애도와 명복을 비는 것 자체가 피해자,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는, 가령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이들. 대부분의 침략자와 학살자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도덕적 기준을 잣대 삼지 않는 것 역시 인정되어야겠죠.

 

반대로 말하자면 죄인이 아닌,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무고한 사람들이 사고, 재난, 범죄의 피해로 죽거나 다쳤을 때 그것을 조롱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고 그러한 행동이 가져다주는 이점이 없기 때문이며 도덕이란 사회화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기에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건이나 사고, 재난, 참사, 학살에 대해 피해자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순히 그들이 사회화가 덜 이루어졌거나 도덕적 훈련이 덜 되었다는 것 이상의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정치적 진영의 차이가 그러하고, 정치적 책임의 유무가 어느 쪽에 더 실려 있는지에 따라서도 그러한 입장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객관적 도덕 기준보다 우선했을 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죠. 우리 진영의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그러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위치와 상황에 있을 때 그 지지자들은 그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여러 활동들을 전개합니다.

 

그러한 활동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거나 집단의 전략적 행동이 아니고 단순히 각 개인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봐야하는데, 이는 특히 내집단의 무오함을 신봉하거나, 무오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많을 수록 발생하기 쉽죠. 다시 말해, 더 극단주의자가 많은 쪽일수록 그러한 정신증이 쉽게 발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적을 만들거나, 희생자를 만들거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집기도 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서 덮어씌우거나 작은 죄를 과대포장하여 깍아내리기도 합니다. 희생자나 피해자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의해 무고한 자에서 위선적이거나 욕심많은 장사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더더욱 공격하고 자신의 공격이 정당하다고 믿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분명히 존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영이나 입장에 따라 책임추궁에 태도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과 같은 합리적 기준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모든 잘못과 책임에 그 어떤 추궁도 하지 않고 그들은 항상 무오한 집단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도덕적 기준으로 0, 0의 좌표에서 멀어질수록 극단적인 성향이라면 정치적 도그마의 점수가 높을수록 도덕적 기준에서도 멀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나와 남의 구분에 따라 나, 혹은 내가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집단內集團과 그렇지 않은 외집단外集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내집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건의 피해자는 곧 외집단으로 분류되고, 도덕적 기준의 작동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내집단의 전사들이 외집단의 민간인에 도덕적 기준 대신 힘의 논리를 작동시키고, 포식자가 사냥감에 공감하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처럼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오비이락이란 서로 다른 현상을 한가지 인과로 엮어 설명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어떠한 현상(혹은 사건)에 대해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그 사람이 특별히 멍청하거나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릴만한 경험을 받아들여 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 혹은 상식의 차이는 그가 살아온 사회의 층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층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층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정서 내지는 사회문화적 밈일 가능성 역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특별히 더 많이 지닌 지역은 그러한 정서 내지는 밈이 그 지역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공통적으로 잔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라도라는 지역과 그 지역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인식은 오비이락식 해석에 의해 사소하거나 심지어 겪어본 적도 없거나, 아예 과장 내지는 거짓말일 경우조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내집단의 일반적인 감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내집단은 가족/집안 단위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도 역시 밀도 있는 얼개를 지닌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끈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비이락식 해석에 익숙해지고 다양한 분야에 같은 방식의 해석을 적용한다면 그 세계관은 더 논리적인 형식으로 구성되기보단 피상적이고 경험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경험이란 실제로 겪은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누군가의 발언 내지는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집단의 것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적 성격을 띄지만, 외집단의 것에 대해서는 반사적 거부감을 먼저 일으킬 것이고요. 그 사이에서 편견은 매우 활성화 됩니다.

 

 

그러한 세계관/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무고한 사람이 죽은 참사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피해자에 이입과 공감을 하기보단 그들에게 없는 죄를 찾아내거나,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태원에서 압사 당한 사람들에게 왜 쓸데없이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그런 사고를 내냐거나, 당국에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왜 나라 탓을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도덕과 윤리란 객관적,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적이고 정치적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작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해서 작동합니다. 정치적 이념은 그러한 내외집단의 구분 기준에 충실한 근거일 뿐이죠.

 

 

논리는 올바른 형식과 원리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논리 역시 훈련받아야 가능한 것이고 모든 경우에 단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세계관 하에서 특정한 논리는 그 개인에게 합리성을 획득할 수 있고 그 세계관 내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죠.

 

그것이 일반적인 객관성이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그 오류를 쉽게 자각하거나 논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의 논쟁에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확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시적인 후퇴나 보류를 결정하게 할 뿐이지 자신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온 기반 논리가 틀린 것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모든 판단기준과 그러한 기준에 따라 살아온 자신의 삶이 틀린 것으로 부정되는 세계관적 충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세계관이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수준의 간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동일 세계관 내지는 유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역시 매우 많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포기하거나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틀린 증거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신과 같거나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 역시 사회화인 까닭에, 약자에 무자비하고 강자에 비굴한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환경/사회/층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덕의 영역에서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0, 0의 좌표에서 더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를 포함하는 다양한(앞서 설명한 여러 요소들) 이유들의 합에 의해 더 극단적인 가치관,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우, 극좌 타입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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