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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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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8.04.30
    아프리카의 시위 민주주의.
  2. 2018.04.27
    한국전쟁 종전. 오늘 우리는 역사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3. 2018.04.19
    김경수-드루킹 사건. 민주당과 문 정권에 대한 부당한 선동비난.
  4. 2018.04.17
    천재의 죽음과 죄인의 고백, 아마데우스 리뷰.
  5. 2018.04.08
    통치 수장의 유능함과 무능함.
  6. 2018.04.08
    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
  7. 2018.04.07
    Julia Westlin - Unintended // 가사, 해석, 커버
  8. 2018.04.06
    Holly Henry - Hello // 가사, 해석,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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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d.com/talks/zachariah_mampilly_how_protest_is_redefining_democracy_around_the_world?language=ko




예전에, 타 커뮤니티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누군가 선거 또한 하나의 세뇌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세뇌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반발했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도 봅니다. 기실, 보수 진영에서 시위와 집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실제로 그러한 것들이 억압 받으며, 불만이 있으면 힘을 가지던가 선거를 통해 해결하라는 화법을 사용하곤 했죠.


그것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 의한 일일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선거와 투표만이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시위와 집회는 강경한 행위이고, 혼란과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위험하거나 어찌됐든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그런 것이다. 라는 편견이 선거 또한 세뇌이다. 라는 의미였지 싶습니다.


뭐, 사실 시위와 집회가 많았고, 지금도 이루어지는 일이며, 요 몇년 동안 이루어진 집회와 시위 문화는 꽤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적 경험이고 사례이죠.



그런 맥락에서 시위와 같은 직접적 행위, 비정규적 실천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시행되고 작동하는, 혹은 그래야 하는 어떤 사회에서든 장려되야할 것입니다. 국가와 같은 비대한 집단에서 문제는 언제나 발생하고, 그 규모가 크든 작든 누군가는 피해를 보고, 이것들은 고쳐져야할 일들이죠. 그러나 그것을 선거와 같은 방식으로 요구한다면 더욱 비효율적이고 더 많은 비용을 야기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이어야 하고, 집회와 시위는 폭력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닌, 집단화되어 다수의 의견을 표출하고, 그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며, 의제에 동참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직화된 민주적 의견 표출 방식입니다.


이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며, 위험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한 편견이나 인식이 은연 중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활동을 반대하고 억압하고, 묵살하려는 세력이 만들어낸, 만들어냈던 의지에 오염된 것이죠. 



우리의 생각보다 시위와 같은 적극적 의견 표현 방식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관심가지지 못했던 아프리카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프리카 또한 사람 사는 곳이고, 시간의 흐름만큼 변화하는 세상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종종 민주적인 절차에 불만을 느낍니다. 골치 아프고 복잡하죠. 때로는 비효율적입니다. 우리의 정치적인 지도자들은 평범한 이들의 관심사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우리 일상의 과업과 동떨어져있는 지도자의 투표는 무의미하다고 많은 이들이 느낍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거부하기에 앞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저는 아프리카의 운동가들이 시위를 중심에 두며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시위 민주주의"라 일컫는 것이죠.



00:53


국제 기관과 전문가들은 민주주의가 평범한 여러 정당의 선거 경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투표함을 앞에 둔 엘리트들의 경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매일 참여하는 무언가가 되어야만합니다. 제가 "시위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저는 민주주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거스르게 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바라보는 것은 부적절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민주주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를 거부해야만 합니다.



01:36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점점 더 거리로 나아가고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사회적 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이는 아프리카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더 효과적인 비폭력 행동을 위해 점점 더 거리로 나아가고 조직화된 폭력을 거부합니다.



02:12


저는 지난 이 십년의 대부분 동안 폭력적, 비폭력적인 아프리카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는 알려진 거의 대부분의 정권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친구 티아트입니다. 그는 세네갈 출신의 래퍼입니다. 세네갈의 큰 운동을 이끌었고 이 운동은 대통령이 세 번째 임기를 채우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습니다. 모로코에서 레소토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 군주제를 저지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수단에서는 잔혹한 독재에 맞서고 있죠. 우간다와 에티오피아에서는 유사 민주주의의 탈을 쓴 강력한 군사국가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찍힌 남아프리카와 브룬디에서는 평범한 이들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는데 기여하지 못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에게 대항했죠. 대륙 전체에서 시위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독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위를 할 뿐 아니라 권력을 멈추게 할 때도 사용합니다. 어떤 면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민주주의 자체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그 가치를 높이면서 말이죠.



03:26


아프리카의 시위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고 현재 우리는 2005년에 시작된 세 번째의 물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에서 일어났던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흐름은 1940년대와 1950년대 사이에 일어났고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를 이끌었습니다. 과메 은크루마가 이끈 가나의 연립정부가 영국의 지배를 무너뜨렸습니다. 전세계에 비폭력 운동의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말이죠. 두 번째 물결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아프리카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 긴축 정책에 맞서는 것이었죠. 이러한 시위들은 독재정권의 붕괴를 이끌었고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복수 정당 선거를 도입했습니다.



04:13


현재 진행중인 세 번째 물결은 앞선 두 개의 물결의 결점을 보완합니다. 첫 번째 물결은 자유를 가져왔지만 민주주의를 가져오진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선거를 도입했지만 엘리트들을 위한 선거였죠. 세 번째 물결은 민주주의를 보통 사람들의 통치로 바꾸는 것과 가장 연관이 있습니다. 이는 세네갈의 '지긋지긋해' 운동과 부르키나 파소의 시민의 빗자루 운동 짐바브웨의 타자무카 콩고 민주공화국의 루차와 플림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인 시스템에 도전하기 위해 인습적인 비정부기관이나 정당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운동들이 종종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루차의 프레드 바우마와 같은 똑똑한 젊은 활동가들이 구금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국제사회의 항의는 거의 없었죠. 저희가 모든 데이터에서 보시다시피 목록은 계속됩니다. 2005년 이후 40개가 넘는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규모가 큰 유명한 시위들이 있었습니다. 보시면 2011년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해에 실제로 이 광범위한 파장이 절정에 달합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많은 시위들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들이 몰락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시위들은 대통령이 세 번째 임기를 채우는 것을 막았죠. 세네갈, 말라위, 그리고 부르키나 파소에서요.



05:43


이 시위를 고조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구통계학적으로 아프리카는 가장 젊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륙입니다.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나이 차도 가장 크죠. 아프리카는 엄청난 속도로 도시화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십 년이 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아시아의 투자의 영향을 받았죠. 그러나 이 부의 극히 일부만이 국민에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산업 분야의 정규직은 실질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생계를 겨우 꾸려나가는 이들에게 비정규직의 일자리만 남아있죠. 그 결과 불평등이 극심해지고 있으며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보다 나이 어린 국민들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06:26


아프리카 외부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친숙합니다. 극심화된 불평등 한 때, 진보된 사회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높은 임금의 좋은 일자리들의 감소, 한때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던 시민 사회가 사라져가며 발생한 엘리트 정당의 몰락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 국제 경제와 관련된 외부 요소들이 여러분의 생활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가슴 철렁하는 느낌.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절약만을 외치며 무기력해 보입니다. 몇십 년간 공공재가 보이지 않는 단계까지 사라지는데도 말이죠. 동시에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떠넘기며 배타적 민족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미인들이나 서구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것이란 197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들의 평범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랜 기간동안 이런 상황에 저항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07:29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바라보는 것은 만연한 환멸감을 가져옵니다. 대신 평범한 이들이 민주주의적 삶의 중심이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시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여러분의 나이, 성적 취향, 성별에 관계 없이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선거와는 반대로 시위는 엄격한 선거 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즉각적인 피드백의 시대에 즉각적인 형태의 조치를 더 많이 제공하죠.



08:08


둘째로, 시위는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강력해집니다. 시위는 논쟁을 벌이고 경쟁적인 과정이며 불확실한 행동에 의해 규정됩니다 때로는 명확한 메세지가 결여되어 있고 불완전한 기관에 의해 규정되죠. 이 역동성이 시위를 폭동이라고 폄하하거나 제한된 정치적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기도합니다. 억압하기 쉽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죠. 빈번히, 정부는 시위를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의 메세지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회적인 운동을 폭력적으로 짓밟습니다.



08:53


세 번째, 제가 언급한 것처럼 시위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시위는 선 밖을 색칠하는 작업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느끼는 게임의 규칙들을 새로 만드는 방법이죠. 아프리카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일생동안 단 한 명의 지배자가 통치하는 사회에서 자라왔어요. 시위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는 공간입니다. 젊은이들이 그들이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면서요.



09:24


제 친구인 린다 마사리라의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다섯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죠. 그녀는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권에 대항하는 시위를 이끌고 있어요. 두들겨 맞고, 체포되고, 괴롭힘을 당했죠. 하지만 견뎠어요. 몇 달 전 제게 말했던 것처럼, 시위는 그녀에게 의미와 방향성을 주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닥칠 역경을 알고 있지만 린다는 굴하지 않습니다.



09:47


린다나 아프리카의 다른 젊은 활동가들처럼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를 선거와 정당 그 이상으로 재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민주주의는 창의적인 과정이며 시위는 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인 상상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매개체가 되어 왔습니다.



10:08


(스와힐리어) 대단히 고맙습니다.



10:09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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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전쟁은 1953년 한국만 빠진 휴전협정을 통해 중단되었고, 6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 넘도록 수 많은 일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이 태어났으며, 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슬픔과 고통, 번민과 괴로움, 행복과 즐거움, 사랑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투쟁을 하며 살았고, 누군가는 깔아놓은 전철을 타고 살았으며, 때로는 좋은 일도, 때로는 힘든 일도 있으며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남들과 같은 일상.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같은 일상을요. 하지만 이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휴전의 상황에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전쟁의 위협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전쟁 이후, 전후 세대에게 있어선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하나의 투쟁이었지요. 이전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체제를 하나의 선을 두고 다르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합의를 통해 마침내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제 전쟁은 없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간의 위협은 이제 없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한 시대가 끝났고, 한 체제가 끝났으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또 다른 체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 속에 있었고, 역사 속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그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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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경수-드루킹 관련 사안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광범위하고 대대적인 비난과 선동이 들어가고 있는데, 솔직히 전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난은 아예 틀렸다고 봅니다. 김경수가 비판을 받을 껀덕지는 있지만, 민주당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 글자 그대로 악의적 선동이죠.


이미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 어떠한 청탁과 그것을 통한 엽관적 이익관계가 있었는지, 그리고 드루킹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정신을 가진 인물인지에 대해 판단에 있어서 충분할 정도의 정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김경수가 비판 받을 껀덕지는 있지만,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은 악의적 선동이라고 봐야 할 것이고, 드루킹이라는 인물은 정신과에 가야할 사람이라는 겁니다.



드루킹이 발생시킨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존의 파워블로거지라 불리던 이들과 다를 거 없는 행태였죠. 내가 여기 블로그에 포스팅 했으니 공짜로 해달라, 그래서 싫다고 하니 역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드루킹도 하등 창의성 없는 행위를 반복할 겁니다. 단지 그 영역과 수준이 달랐을 뿐이죠.


자기 혼자 정치인 후원하고 지지운동하면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의원이 당선이 되자 그에 대해 공직 자리를 청탁을 하는 엽관을 요구했죠. 그리고 그게 들어먹지 않으니 반대로 휙 돌아서서 매크로를 돌리는 등 댓글부대로 여론조작에 나선 것이죠.



정작 김경수 본인은 그것을 거부했고, 드루킹이 보내는 문자를 거의 대부분 무시했으며, 추천을 한 것까지야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는 추천을 한 것 뿐이지 검증은 추천을 받은 쪽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검증에서 결격되었으니 드루킹이 그 짓거리를 해댄 것 뿐이죠.



바로 그 이유로 드루킹에 대해 프락치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마저 나왔던 겁니다. 제정신으로 할 행위가 아니었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었으며, 그 결과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프락치로 여겨질 수 있을 법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드루킹은 그마저도 못 되는 모지리였던 것 뿐입니다.


드루킹과 민주당원들의 여론조작 사태에 대해서 민주당이 욕을 먹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앞서처럼 비난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비판을 받을 껀덕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건 단지 그 당사자들이 민주당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의 껀덕지도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사라집니다. 따라서 민주당원이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 비난하는 건 의심할 법한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당원이 되는 건 단지 신청하고 당적이 오르기만 하면 되는 거고, 매달 당비 1000원만 내면 되는 그런 겁니다. 원한다면 그 누구든지 될 수 있고, 귀찮을 뿐이지 이 당 저 당 옮겨다니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닙니다. 민주당 내부에서 높은 위치나 입지가 있고 영향력이 유의미한 수준인 사람이 아니라면 민주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주당을 비판하는 건 앞서와 같이 의심할 법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밖에요.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드루킹이라는 이상한 인간과, 그 인간을 추종하는 머저리들에 의한 것입니다. 직접 당사자인 김경수는 관련 의혹이 있으니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현재로선 민주당은 관련 의혹이 없는 건 아니더라도, 직접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웬 정신이상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뜬금 없는 피해와 정당치 못한 비난을 받고 있으니. 민주당도, 문재인도 연관된 증거와 정황이 없는데 댓글부대를 운용하여 여론조작을 했다느니, 심지어 문캠 산하 조직이 의심된다느니 배후가 어쩌고 국기문란이 어쩌고 국정원과 다를 게 뭐냐, MB, 근혜와 다를 게 뭐냐. 이 소리를 해대고 있죠.



야당과 언론이 한 마음 한 뜻이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의도와 이유는 뻔 합니다. 기본적으로, 그 동안 까일 껀덕지가 너무 없었던,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정권이었던 만큼 공격할 여지가 적었는데, 이번에 한번 잘 걸렸다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 이유로 부당하고 과장되고 선동적인 비난을 신나서 해대고 있는 거죠. 그러한 목적이야 당연히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이번 지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고요. 적어도 전자만큼은 확실한 목표입니다.


그러니 정당, 정치인들은 망상을 뿜어대는 거고 언론에선 부당하고 과장된 문장과 문구를 사용하고, 심지어 소설에 가까운 내용을 써가며 공격하는 겁니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를 과거 범죄정권과 같은 적폐로 몰고 있지만, 실상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그들이 적폐 그 자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고, 과거 십알단 사건보다도 급이 낮은 사건입니다. 언론과 야당에서 기를 쓰고 확대시키고 불을 붙히며 키우는 것에 비해, 어떤 의미로는 사소할 정도의 스캔들이죠.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민주당 쪽에서도 기민하고 영민한 대응이 필요해졌지만, 그들에게 하는 비판만큼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번 사건만 보면 찰스 기토 같은 놈인데, 실은 그보다 멍청한 인간일 뿐이죠. 망상에 기인한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교주가 된 인간인데 이게 정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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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작품은 살리에리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책감으로 절규하듯 뱉어나다 끝내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려고 하죠. 그러나 하인들에 의해 구조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라고 권하죠.

 

작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부각되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부각됩니다. 신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나, 알지 못하고, 모짜르트의 곡을 들려주자 너무나도 쉽고 열정적으로 칭찬하죠. 유력한 궁정악장이자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의 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고, 오직 천재의 곡만이 수 십년이 지나서도 기억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고백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실제 역사가 어떠했든, 작품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작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죠. 특히 작품이 끝날 때까지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속성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질투라는 건 사람을 망치죠. 자신을 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더 추하게 만들죠.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으로 왕정의 예법과 정치에 박식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격 있고 귀족적, 신사적인 태도의 모습과 대조되게, 아마데우스의 모습은 천박하고 방정맞죠.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들은 살리에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범속함을, 평범함을. 그리고 질투는 거기에서 시작하죠.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부정당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천재에 대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임을 알았을 때, 열등감이 발생하고, 질투가 생깁니다. 그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자신이 그와 같고 싶고, 그 재능을 빼앗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됨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 질투이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질투이니, 그러면 안 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죠.

 

살리에리는 그러한 열등감과 질투를 이겨내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성장과 성공을 의도적으로 막았습니다. 심지어 한 순간의 충동이었으나, 볼프강의 아내에게 몸을 요구하기도 했죠. 물론 바로 내보내긴 했지만,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수치심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가 오직 원했던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모차르트의 행동은 오만하지만 자기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허용될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에 대해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만함은 사람들의 반감을 불렀죠. 너무 경박하고 방종하여 높은 사람들이 그의 태도를 싫어했지만, 천재 모차르트는 자유로웠던 것이고, 자유롭고 했던 겁니다. 그는 음악을 제외하면 생활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색하고 뻔뻔했지만, 그만큼 순수했죠. 

 

그는 진정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에서 묘사되는 모차르트의 특이성은 그가 범속하지 않은 천재임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죠. 그러한 재능은 더 높은 수준의 음악 작품을 추구했고, 그러한 추구는 법, 통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러한 성향과 추구는 왕실과 다른 인물들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묘사하는 여러 장치들이 작품 속에서 많다고 했는데, 살리에리와 첫 대면을 할 때, 처음 들은 음악을 듣자 마자 똑같이 연주하고, 그 이상으로 편곡하여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진화시켜버리는 모습도 그렇고, 특히 인상적인 것들은 술집에서 거꾸로 피아노를 연주한 부분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것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마치 일상 그 자체가 음악의 영감이 된다는 듯, 장모님의 비난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고 승화시켜 그 유명한 마술피리의 아리아 중 하나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나왔죠.

 

그리고 중간 중간 곡 작업 중 단지 악보를 쓸 때에도, 보기만 함에도 머리속에서 음악이 완벽하고 충실하게 연주되죠. 이 부분이 정말 예술적이고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여겨지는데, 그의 말처럼 머리 속에 곡이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옮겨 적는 것일 뿐이다. 하는 것처럼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이미 완성된 것이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러한 것을 살리에리는 통찰해냈죠. 단지 악보만 보고, 수정한 부분이 없다. 그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라고요. 그만큼 그의 음악적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인데 말이죠.

 

 

그러한 천재성은 살리에리로 하여금 극도의 열등감을 발생시켰고, 심화되어 질투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이 천재를 죽인 거죠. 모차르트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밥줄을 끊으려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며, 종래엔 모차르트의 심력이 다해 죽음에 이르게 하죠.

 

하지만 살리에리의 수작에 의해 그렇게 되었음에도 그의 천재성과 음악성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살리에리였습니다. 본인이 회고하듯, 자신의 수작에 의해 공연은 몇 차례 할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가서 관람을 했다고 하죠. 마치 자신만 그것을 독점하여 즐기고자 하고 싶기에.

 

그것이 질투의 속성입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생기는 복잡함. 가질 수 없기에 고통스럽고, 가질 수 없기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환희마저 느끼는 그러한 것.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가질 수 없기에 모차르트를 싫어했고, 싫어하기에 죽이고 싶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차르트는 음악에선 결코 가닿을 수 없었지만, 손에 닿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존재를 보는 것 자체로 자신을 괴롭게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작품만큼은 음악인으로서 황홀했고.

 

결국 살리에리는 자신의 질투에 굴복했죠. 자신의 열정, 노력을 바쳤으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충실히 독실했던 살리에리가 그렇게 망가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의 7대 죄악 중 하나가 질투라는 점이죠. 질투가 사람을 망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독실했지만 천재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것도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보아야 했던 범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살리에리는 신을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면, 신의 거룩함을 노래할 수 있는 도구로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신을 조롱하고자 했습니다. 신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표현해주는 진짜 천재인 모차르트를 죽임으로써!

 

 

모차르트는 뛰어난 천재이자 음악가였지만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예의, 예절, 인격, 생활.. 아내를 사랑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진 못했습니다. 자유로운 천재에게 그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것들에 비해선 중요했으니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였지요.

 

앞서 말했듯, 그의 예의와 예절, 금기에 대한 도전은 그가 천재로서 자유로웠고, 창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시도와 더 많은 도전이 자신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도구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더 완벽한 예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만한 천재는 반감을 사기 쉽고, 뛰어난 천재는 시대를 앞서 나가기에, 빈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음악적 변화를 이끌어냈죠. 음악은 자신의 감성에서 창조되는 바, 그만큼 힘들고 괴로웠음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음악을 통해 그의 심경과 변화를 읽어냈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됩니다.

 

아버지가 썼던 가면을 하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진혼곡을 작곡하게 하죠. 바로 자기 자신의 진혼곡이 될 그 곡을.

 

인정 받지 못하는 모차르트는 점점 망가져갔고, 가정형편의 어려움은 아내와의 신뢰마저도 갈라지게 합니다. 아내를 배신하고 친구와 술마시고 놀 때 아내는 떠나갔고, 가정에서 한번 더 실패한 모차르트는 점점 더 힘들어져가죠.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가면을 입은 자는 독촉하고, 불길한 곡을 쓰면서도 친구의 공연에서 연주하다 결국 쓰러집니다. 살리에리가 그의 집까지 옮겨주었으나, 결국 작업 도중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심력이 다해버린 것처럼 묘사되죠. 다만 진혼곡은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요.

 

 

살리에리의 회고는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함께 끝났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아이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추악한 죄인으로서.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을 조롱하고 욕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즐거워했죠. 광오하게도, 자신이 신에게 한방 먹였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혹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자인양 다른 환자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웃으며 퇴장합니다. 그것은 모든 범속한 자를 대표하는 범인의 대표자로서의 권위이겠지요.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인정 받고 사랑 받는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한 감성과 심미성을 가지기 때문이겠죠. 그림과 음악이란 그런 것이죠. 영화에서도 그러한 예술성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면, 아마데우스 또한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적 미를 잘 살렸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작품의 연출과 묘사를 이끌어낸 영화 아마데우스는 예술가의 일생과 인간의 감성을 섬세하게 작품에 담았죠. 그 구성, 연출, 묘사. 

 

앞서에서도 서술했듯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부각하고, 그러한 천재로서 사회와 규범에서 돌출되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게 사치와 철 없음을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의 성숙을 비판하고 있음에도요.

 

처음 듣는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도, 그러한 것을 원작보다 더 다채롭고 더 아름답게 편곡하는 능력도, 모든 음악과 곡은 머리 속에 다 있어서 단지 옮겨적기만 하면 되는 비상함도, 작곡을 할 때 울리는 음악의 연출과, 악보를 보면 역시 연주되는 곡의 연출 등 그에게 음악은 최고의 음악가들에 비해 더 다양하고 다채롭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신을 찬미하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말처럼, 그것은 단연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됨됨이와 성숙함, 사회적 존경에 대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으나, 질투와 열등감에 빠져 파괴되고 몰락해가는 인격의 인간상은 더더욱 잘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경외를 가지고 있으며 신실한 신자로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하나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덕을 베푼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생활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탕하고 방종한 모차르트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재능은 그에게 하여금 모차르트는 그의 재능에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음악을 동경하고 경배했으나, 그러한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인간에게서 나왔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주는 그러한 찬미와 신의 음성을 대변할 도구로 신실하고 노력하는 자신이 아니라 범재에겐 불허되는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를 선택한 신에게까지 이르죠. 질투는 가속화되기에.

 

결국 범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가져선 안 될 질투는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죽이게 되었고, 자신 또한 32년간 죄책감 속에 갇혀 살다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죠.

 

 

실제 역사와 차이가 꽤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작품으로서, 이만한 완성도와 예술성을 갖춘 음악 영화가 또 얼마나 있을까요. 단지 이야기로서, 작품으로서만 본다면 굉장한 걸작인 셈입니다. 고전 명작이라 이름 붙을만한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완성도 있는 짜임새의 극과, 섬세하면서도 도전적인 묘사와 직관적인 연출, 그것을 완벽하게 살리는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 감독판의 경우 3시간이라는 길이가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볼 정도의 영화죠. 도대체 이 작품에서 어디가 빠질만한 부분이 있었는가가 의문일 정도로.

 

마지막으로 범인의 대표자로서, 모든 범속한 자들의 평범함을 용서하는 살리에리의 판결로 글을 마칩니다.

 

 

난 세상의 모든 범인(凡人)을 대변한다오. 내가 그들의 대변자이지. 난 그들의 수호성인이야. 세상의 범인들이여!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희 모두를 용서하노라.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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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같은 집단의 수장이 무능하고 멍청하면 주변 사람도 피곤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 집단의 구성원 다수는 괴롭습니다. 통치자로서 가지는 권한과 권력이 거대한 만큼 무능함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는 사회 전방위적인 분야에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의 수장은 그 자리에 어울릴만큼 유능해야하며, 그 이상으로 판단력과 덕성의 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유능하되 사익을 추구하여 사회적 병폐를 발생시키고, 무능하되 덕성이 높다면 실패한 정치를 하게 되죠. 그런 문제를 가졌기 때문에 집단의 수장은 반드시 유능하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과 사의 구분은 고래로부터 하나의 공의로 여겨졌는데, 수장이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공사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자기 통제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감정과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 적용된다면 그 자체로 불공정한 통치인 셈이죠.


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점은,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서 불공평을 발생시키고 그 이상으로 폐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서 발생할 수록 문제가 커지는데, 가령 일국의 대통령과의 친분에 따라 공적인 재화, 서비스, 권리, 권한 따위를 사적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친분만으로 이권이 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는 이런 조건들에서 실격되었습니다. 사적인 관계로 최순실에게 정치를 통치의 의무와 권한을 넘겼고, 공적인 영역에선 실패했으며, 도덕적이지 않은 통치와 인간관계와 조직관계를 맺어왔죠. 



무능한 통치자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지만, 사실 환영 받는 이들은 있습니다. 무능하거나 딱 일정 정도까지만 유능한 간신과 그러한 통치자를 대해야 하는 타국이죠. 


무능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뒤떨어지고, 뒤떨어지는 판단력은 첨예한 이성과 합리가 아닌 감정과 선호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며, 간신과 같은 이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게 된다면 그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게 되며, 마찬가지로 올바른 결과로 나아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능력과 실력이 아닌 통치자와의 관계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질 수 있기에 더더욱 나쁩니다.


결국 무능하고 덕성이 떨어지는 통치자와 그 주변인들은 정치를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이고, 공적 신뢰는 파탄날 것이며 그 이상으로 국가의 중추적 영역(특히 경제)은 점차적으로 혼란하게 됩니다. 


여기서 외교에 있어서는 더 문제가 커지는데, 무능하고 멍청한 통치자만큼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문제가 국가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착취와 부정이라면, 후자의 문제는 국가 외부로 발생하는 착취와 다름 없다는 게 문제죠. 여기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거고요.



정치, 외교는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공적인 사안이며 이러한 사안을 다룰 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둬야 합니다. 없을 수는 없겠지만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아쉬운 입장에서 타국에게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국의 역량만큼의 태도와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무능한 거고 멍청한 거죠.


물론 정치구조에 있어서 시스템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정점이기 때문에 시스템에서도 돌출될 수밖에 없는 대통령과 같은 통치자에게 감정과 사적 인식을 거세하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한 요소가 과도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발현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독재자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영역에 투사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면 사적인 관계를 잘 이루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쁩니다. 그 나라의 참모, 싱크탱크 등의 인력들에 의해 조언을 받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정치와 외교적 정책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주변인, 혹은 타국은 자신들이 내줄 비용과 협상력을 아낄 수 있고, 그러한 개인간의 관계와 판단만을 통제하고 유도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죠.



물론 실제 현실에서 아무리 멍청해도 공과 사의 구분을 그만큼 못하는 대통령, 독재자, 군주같은 통치자가 있진 않습니다. 있어도 드물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공사 구분의 문제를 차치해놓더라도, 무능하고 멍청한 통치자를 타국이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국의 유능한 참모와 실무자, 통치자 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타국에 대한 이익추구 행위가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타국에 이루어지는 활동과 공작, 협상에 있어 상대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국가의 이익과 권리가 밖으로 유출되는 거고, 그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타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부는 외교의 면에선 유능했지만 내부적으로 무능했고, 대통령 개인과 그와 가까웠던 주변인은 덕성이 높았지만, 그 정당 내부의 이들은 도덕적이지 못했으며,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내외부적으로 무능했고 도덕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외교의 면에서 이명박 정권, 특히 박근혜 정권은 매우 무능했고, 이명박 정권은 친미일변도의 기조를 유지하며 극친미적 외교로 미국과의 관계는 좋았지만, 그 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능했고, 미국에게도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정당한 협상과 대화보다는 언듯 끌려가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외교는 총체적인 실패인데, 능력도 없으면서 어중간한 줄타기, 혹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외교는 중국에게 큰 제재와 불신을, 미국에게도 신뢰에 대한 시험을 발생시키며 사드 배치 문제에 있어서 양국의 압박과 제재를 받았죠. 일본 또한 꾸준히 평화헌법 개정과 보통국가화를 이룩해가는 것을 억제하거나 견제하지도 못했습니다.


미국, 일본에 대한 이명박의 태도와 중국, 미국에 대한 박근혜의 태도는 다분히 비굴했고, 그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타국은 더더욱 한국을 낮게 평가했을 겁니다.


이러한 무능함은 타국에겐 업신여김과 무시를 받고, 겉으로 보이는 나름 괜찮은 평가와 대우는 그만큼 뜯어먹을 게 많은 먹잇감이기 때문에 그 대표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죠. 정치의 기본이니까요.



사실 한국의 덩치와 역량은 충분히 유럽에서도 독-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며, 그러한 국력을 가진 국가로서 오만할 건 없지만, 그에 맞는 태도와 외교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의 두 정권과는 반대로 문재인 정권은 상당히 유능하고 적절한 외교를 하고 있고, 그런 성과를 보이고도 있죠.


한국이 자국인들은 자각하지 못할 지 몰라도,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 그러한 수준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안 되는데, 문재인은 그러한 면에서 합격점에 속한다고 봐야합니다. 자국의 힘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고 그 역량을 가지고 외교를 하고 있기에 중국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나 사드 배치를 철회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사드 배치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줄었고, 경제제재는 공식적으로 철회했고 실제로도 크게 줄었죠.


미국과의 관계는 트럼프의 발언과 취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친한국, 친문적인 관계를 만들었고, 대북문제에 있어선 문재인만의 성과는 아니지만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냈고, 일본패싱이라 칭할 수 있는 외교적 견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끼고 싶지만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최근 아주 몸이 달아올랐죠.



한국이 자국의 역량에 맞는 외교와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국은 한국을 이전과 같은 태도와 방식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차이는 시대인식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극우보수들이 통치로서의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무능하고 부정하며 심지어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고 파악하지 못해 멍청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겠죠.


특히 시대 인식의 문제는 그들이 70년대, 80년대에 사는 줄 안다는 비판을 받는 원인과 같은 궤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인식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국제에 대한 인상과 가치관, 방법론은 그 시절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들에게 외국, 특히 강대국과 선진국들이라 여겨지는 국가들은 한국보다 잘살고 강하고 발달된 국가로서 잘보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비굴하고 사대적이며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죠. 과거의 한국은 그만큼 모자랐고 부족했고 약했기 때문에 후진적 의식수준과 결부해 그러한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국민들에게도, 특히 정치 일선에 서 있는 이들에게 있어선 더더욱 빠르고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필요했지만, 극우보수 세력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런 인식과 가치관 때문에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외교에 있어서 비굴하고 소극적이었으며 자국의 역량과 가능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외교적 실패는 그들의 무능에도 있지만, 그들의 시대인식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바죠. 가령 G20 당시의 국격드립은 그러한 천박하고 비굴한 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통치자가 유능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항상 발전을 지향해야 하며, 국가구성원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무능한 통치자는 내치에서도, 외치에서도 대개 실패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도덕적으로도 결함이 있다면 그러한 공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게 되죠. 


p.s 전에 한번 썼다 날려먹은 글이라 처음 썼던 내용과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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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점은,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서 불공평을 발생시키고 그 이상으로 폐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서 발생할 수록 문제가 커지는데, 가령 일국의 대통령과의 친분에 따라 공적인 재화, 서비스, 권리, 권한 따위를 사적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친분만으로 이권이 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정치, 외교는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공적인 사안이며 이러한 사안을 다룰 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둬야 합니다. 없을 수는 없겠지만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아쉬운 입장에서 타국에게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국의 역량만큼의 태도와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무능한 거고 멍청한 거죠.


대통령, 독재자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영역에 투사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면 사적인 관계를 잘 이루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쁩니다. 그 나라의 참모, 싱크탱크 등의 인력들에 의해 조언을 받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정치와 외교적 정책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주변인, 혹은 타국은 자신들이 내줄 비용과 협상력을 아낄 수 있고, 그러한 개인간의 관계와 판단만을 통제하고 유도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죠.


발췌 : http://konn.tistory.com/593



공사의 구분은 공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이라면 기본적으로 구분해야 하는 능력입니다. 이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폐혜를 발생시키며, 거시적으로 조직에 독이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불공평하고 정당하지 않다면 그 조직의 공적 신뢰도가 어떻게 될 지는 모두 알만한 일이겠죠.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조직과 집단, 수장은 더 이상 능력과 실력이 평가의 대상이 아닌 인맥과 친분이 평가의 요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그러한 친분에서 밀리면 승진할 수 없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게 되죠. 흔한 증소기업에서 발생하는 인맥, 친목 문제와도 맞닿은 문제입니다.


조직은 조직화되어 있을 수록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게 됩니다. 시스템이라는 구조가 발생하고, 그 시스템을 규칙으로 움직이죠. 실제 돌아가는 건 인간에 의해서이지만, 시스템이라는 비인간적 구조가 있기 때문에 부정이 발생하고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적어지죠. 그게 시스템과 구조의 가치이자 안전성입니다.


그러한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인적 관리와 효율을 대상으로 하는데, 공사의 구분이 무너지면 이 시스템의 근본 목적이 무너지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조직은 언제가 됐든 비효율과 부정함을 안고 가게 되고, 조직의 기반과 역량이 약하다면 무너지게 되거나 쇠퇴됩니다.


단지 친분에 의해 능력과 별개로 승진하고 더 높은 권한과 의무를 짊어진다면 어떠한 파탄이 나는지는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친분만으로 높은 계급을 가지게 해주고 능력도 없는 이가 그 계급의 권한을 함부로 유용하다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곤 했었죠.



이러한 약점이 조직 밖의 인물에게 이용된다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가령 독재자, 대통령 개인간의 친분만으로 공적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면 일은 굉장히 편해지기 때문이죠. 자국의 역량과 협상력을 아끼고 단지 개인간의 친분만에 공을 들여 더 쉽게,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이는 단 한 사람을 통제하여 국가, 집단 단위의 부정과 부패를 발생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래로부터 군주, 통치자는 공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공의라 여겨졌죠.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부적 불만은 점차 높아져가고 야비한 자, 간사한 자들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갈고 닦지 않고, 덕성을 다듬으려 하지 않으며, 단지 권력자 개인에게 충성과 간언을 하며 부정한 이익과 특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누구도 자신의 능력과 실력만으로 대접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종래엔 간신배와 모지리들만 모여 있는 잡조직이 되어 버립니다. 과거 간신과 암군에 의해 통치 받는 국가가 그러했죠.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그러했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착취의 영역이 되어 버립니다. 통치자에 의해 발생하는 국가 단위의.


이러한 것은 규모와 관계 없는 조직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문제이며, 조직이 커지고 성장하기 위해선 공사의 구분이 철저하고 명확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러하기 위해서 공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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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음과 깔끔한 음색의 당당한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이네요. 한때 뮤즈의 음악을 매일 들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언인텐디드의 차분하고 잔잔함이 마음에 들어 많이 듣곤 했었습니다. 특히 기타 반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말이죠.


그 이후 뮤즈의 곡들은 잘 듣지 않게 되었지만, 뮤즈는 뮤즈고 명반은 명반이며, 좋은 곡은 좋은 곡이죠. 


뮤즈는 의외로 여자들이 부를 때 더 좋은 곡들이 많은 듯 합니다. 매튜 벨라미가 저음도, 고음도 있는 곡들을 많이 부르다보니 오히려 이런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부를 때 더 돋보이지 않나 싶군요.



뮤즈 (MUSE) - Unintended


You could be my unintended. Choice to live my life extended

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이었어. 네가 나타나 내 삶은 새로워졌어

You could be the one I'll always love

이제 넌 내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할 사람이고,

You could be the one who listens to my deepest inquisitions

내 마음 속의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준 걸

You could be the one I'll always love

넌 내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할 단 한 사람이야


 

I'll be there as soon as I can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고 싶은데

But I'm busy mending broken pieces of the life I had before

그 전에 아직 부숴진 내 삶을 주워담아야만 하는 걸

First there was the one who challenged. All my dreams and all my balance

그녀에게 내 꿈과 모든 것들을 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She could never be as good as you

결국 그녀는 네가 될 수 없었지 



I'll be there as soon as I can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고 싶지만

But I'm busy mending broken pieces of the life I had before

아직, 부숴진 내 삶을 주워담아야만 해



가사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arnermusickorea&logNo=220464990105&parentCategoryNo=1&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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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빠진듯, 얇은듯 하지만 심지는 굳은 듯한 목소리가 특징적인 홀리 헨리가 부른 아델의 Hello 커버 곡입니다. 이 영상 말고도 다른 영상, 이를테면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와 같은 곳에서 특히 그 특징과 기교가 돋보이는 편인데, 차분하면서도 몽황적인 면이 있는 목소리로 자기 색깔 풍부하게 부르는 면에 아주 큰 매력을 느꼈죠. 위 영상 말고도 글에 링크 되어 있는 배드 로맨스 곡도 들어보는 걸 권합니다.


Lyrics - 

[Verse 1]

Hello, it's me
안녕 나야.
I was wondering if after all these years You'd like to meet,
시간이 지나고 날 만나고 싶을지 궁금해졌어.
 to go over Everything
이 모든걸 다 지나가기 위해선,
They say that time's supposed to heal ya
그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했지만,
But I ain't done much healing
그렇게 되진 않더라.


Hello, can you hear me?
안녕, 내 말 들리니?
I'm in California dreaming about who we used to be
난 우리가 그렇게 그려왔던 캘리포니아 드리밍 안에 있어
When we were younger and free
우리가 젊고 자유로웠을 때 꿈꿨었던
I've forgotten how it felt before the world fell at our feet
세상을 우리 발 밑에 두고 있을 때의 기분을 잊어버렸어.


[Pre-Chorus 1]
There's such a difference between us
우리 사이엔 차이점이 있지
And a million miles
백만 마일이나 떨어진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Verse 2]
Hello, how are you?
안녕, 어떻게 지내?
It's so typical of me to talk about myself
이런식으로 내 이야기 하는거 이젠 질리지.
I'm sorry, I hope that you're well
미안해, 그냥 네가 잘 지냈으면 해서.
Did you ever make it out of that town Where nothing ever happened?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그곳을 떠나려고 한적이 있었니?



[Pre-Chorus 2]
It's no secret That the both of us are running out of time
우리 둘의 시간이 다 된건 숨길 게 아냐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Bridge]
Ooooohh, anymore
우↑ ↘↘↗↘~~ 더이상은.....
Ooooohh, anymore
우↑ ↗↘↗~~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야....
Ooooohh, anymore
우↑ ↘↘↗↘~~ 더이상은..
Anymore
더이상은... ↗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가사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pop&no=124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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