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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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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7.10.26
    애완견의 위험성과 교육의 필요성.
  2. 2017.10.20
    아이소포스 리뷰.
  3. 2017.10.04
    인터넷 어그로에 대한 단상.
  4. 2017.10.01
    국정원 선동史, 한국 보수는 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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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최시원 애완견 사건 때문에 개빠와 개에 대한 혐오와 증오 등 대중들의 분노가 터져나오고, 심지어 견주 쪽에선 오히려 되도 않는 해명이랍시고 내놓은 게 유족들과 대중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비판점이 많긴 하지만, 사실 이런 사건은 블로거 무량수won님의 의견처럼, 터질 일이 터진 것 뿐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개에 의해 발생하는 상해, 사망 사건은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서야 개에게 물려 죽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경우가 적어서 그렇지, 미국 쪽에선 발생 건수도 적지 않고 그 잔혹도 또한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죠.



먼저, 개가 1만년 넘게 가축화 되면서 인간과의 상호작용과 교감의 수준이 다른 동물들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진화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와 인간의 교감은 단순 가축이나 애완동물의 수준을 넘어서 누군가에겐 혈족 이상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슬퍼할 수도 없죠. 개가 주인을 잊지 못하고, 주인 또한 개를 잊지 못해서 사랑해왔던 가족이 떠난 그 슬픔에 다시 개를 키우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가 사람인 것도 아니고, 개라는 동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바라고 애정을 준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가 성장하고 습관을 들이는 것도 아니거든요.


우리 개는 안 물어요. 평소에 주인을 물지 않는 것 뿐이지 다른 사람을 물지 않는 건 아닙니다. 자신에겐 세상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아이일 순 있어도 객관적으로 개는 개입니다.



개는 교육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건 두번 세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겁니다. 생후 1년 동안 가장 똥꼬발랄하고 에너지 넘치는 시기에 온갖 호기심과 행동력에 휩쓸려 자라는 시기인 이때 교육을 시키고 습관을 들여 놓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개는 인간이 아니고,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교정을 받으면서 사회성을 획득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회적 경험과 잘못된 행동의 배제를 통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적 개인이 만들어지는 거죠. 개라고 해서 다를 건 없습니다. 개 또한 자라면서 교육 시키고 습관을 들여야 아무 문제 없는 바람직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애정과 사랑이 넘치더라도 단지 그 뿐만이라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부모이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일수록 매를 드는 것에 망설임이 없어야 하듯, 개를 키울 때도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혼을 내고 그런 습관을 들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본능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고, 그 종의 습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장치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목줄과 입마개 같은 도구들인 거고요.



마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목줄과 입마개는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만능이 아니고 밖에선 무조건 입마개를 해야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아무리 개에게 목줄을 하고 입마개를 했다고 해도 소형견이 아닌 중대형견에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중대형견이 진짜 눈깔 뒤집어져서 자기 혼자 뛰어나가기 시작하면 성인 남자라고 해도 못 견딥니다. 기본적으로 개의 근육량과 신체 스펙은 인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죠. 


목줄을 해도 얘가 그냥 뛰어나가면 사람은 그냥 끌려가는 겁니다. 진짜로요. 손목 나가기도 쉽고, 목줄을 놓치는 것도 쉬워요. 자기보다 작아 보인다고 해서 자기보다 약한 게 아닙니다. 


그런 개가 갑자기 눈깔 뒤집어져서 뛰쳐나가면, 까놓고 말해서 주인은 못 말입니다. 잡아 당겨도 못 막아요. 입마개도 마찬가집니다. 중대형견이면 20~50kg 안팍인데, 이 정도면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개가 아니라 맹수라고 봐도 됩니다. 입마개를 하면 사람 찢어발기는 걸 막을 뿐이지 그 정도 체중과 근력의 짐승이 덤벼들면 멀쩡할 수가 없습니다. 한방에 좆되는 걸 막을 수 있을 뿐이죠.


입마개와 목줄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지, 만능의 통제력인 게 아닙니다. 중대형견이 빡쳐서 덤벼드는 상황 그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그게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거지 있다고 해서 사람이 안 다치는 거 절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대형견이 덤벼들면 그 자체로 그냥 맹수입니다.



음.. 이렇게 설명하니 뭔가 입마개와 목줄의 의미가 너무 퇴색된 것처럼 서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의미가 없는 건 아니고, 그런 유사상황에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대형개가 눈깔 뒤집어진 상황에서 목줄과 입마개에 의존할 순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목줄과 입마개 덕분히 큰 일이 발생할 뻔 한 것을 막은 사례도 적지 않고 그런 착용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건 그런 상황에서 개를 통제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가급적 안전하고 유의미한 수단이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죠.



에.. 하여간, 마찬가지로 입마개가 좀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선 필요하지만 개의 습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개도 생물이고 생물인 이상 당연히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잘 모르는 뭔가를 보면 냄새를 맡고 입으로 살짝 물어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데, 이를 입질이라고 합니다. 개라면 다 가지고 있는 습성이고요. 


근데 이걸 강제로 입마개를 하고 막는다는 건 그 자체로 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조건이거든요. 당연하지만 스트레스가 쌓인 개는 위험한 거고요.


물론 교육을 잘 하고 습관을 잘 들인 개라면 그런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습니다. 입마개 같은 거 때문에 잘 구속되고 통제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습성을 교육을 통해 잘 습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해도 물 수 없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물지 않게끔 교정을 시켜놨다는 겁니다. 


입질이라는 걸 물리적으로 구속함으로써 아예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개에겐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긴 하지만, 반드시 이걸 어쩔 수 없는 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해 이 습성을 통제하고 절제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입질은 큰 위험이 없는, 공격성이 없는 행위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충분히 위험하거나 아플 수 있는 행동이고, 그 이전에 공포심을 가질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교정해야 하는 일인 셈이죠.


그리고 그런 입질을 자기 맘대로 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는 건 개가 아니라 견주의 문제입니다. 개를 키운다는 건 그런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것이기도 해요.


물론 이런 입질을 아예 통제하고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주는 물건과 사물만을 대상으로 입질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예 입질을 못하게 만들면 그건 그냥 개를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아무 거나 물면 안 되는 거지 주인이 주는 건 물어도 된다는 걸 가르치고 습관을 들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여간 이러한 이유로 생후 1년 정도 되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경우 아주 답답할 수 있습니다. 넘쳐나는 에너지와 호기심에 한창 미쳐 있을 때라서 3번 걸을 때마다 강아지를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럴 때 견주가 어쩔 줄 몰라서,말도 안 듣고 움직여대니 짜증나고 답답해서 그냥 들고 갈 길 가버리기도 하는데, 이건 좋지 않은 겁니다.


그럼 산책을 한 의미가 없거든요. 당연하지만 앞서 말했듯 잘 교육을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목줄훈련, 복종훈련, 산책 중 평정심 유지 훈련 등등.. 만나는 대상에 지나친 호의나 적의를 보이지 않게 배우는 시기가 생후 3개월~6개월 정도이고 그때 교육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개가 사방에 관심을 두고 산만해지면 그 때마다 가볍게 엉덩이를 건드려주거나 말을 걸면서 주의를 주인에게 집중하는 법을 가르치고, 원하지 않는 방향이나 위험할 수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고 하면 목줄을 당겨주며 그러지 못하도록 교정해주고 통제해줘야 합니다.


주인이 가는 방향을 따라 가도록 해야 하고, 주인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막 다가가선 안 된다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개는 사람이 아니고 고도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는 다른 공격성을 가진 종이기도 하고요.



물론 어린 강아지들은 그게 어렵죠. 애들도 가만히 두면 집중 못하고 산만해지기 쉽듯이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집에서 연습을 하고 조금씩 조금씩 그런 주인의 통제에 익숙해지도록 적응시키고 산책의 거리와 범위를 천천히 늘려줘야 하는 겁니다.



또, 개를 키울 땐 개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해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령 좁은 곳에 오래 둔다던가, 한정된 장소에 목줄을 해놓고 풀어주고 산책을 해주지도 않는다던가. 잘 놀아주고 해주지 않거나 하면 개는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스트레스를 받은 짐승들이 다 그렇듯,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되는 거죠. 소형견 정도라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만, 중대형견이면 혼자서 감당 못 합니다. 주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개가 눈깔 뒤집어지고 빡친 상황에선 주인도 못알아봅니다. 심지어 주인도 물고 공격해요. 특히 핏불 같은 투견 견종의 경우엔 피맛을 보고 눈깔이 뒤집어지면 그 자체로 하나의 맹수입니다. 그것도 극도로 위험한 맹수가 말입니다.


심지어 보통 개도 아니고 전문적 훈련을 받은 경찰견마저 한번 대가리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 훈련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물 것을 찾으며 공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번 통제에 실패하면 엄청난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어요.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경우인데,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맹견이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는 데, 사람을 단순히 죽인 걸 넘어서 상체 대부분을 찢어발기고 그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갈기 갈기 뜯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주변에 무서워서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사람은 그걸 지켜봐야만 했고(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보긴 해야 했을테니;) 그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도 하죠.


이외에도 핏불이나 로트와일러 같은 녀석들의 공격성은 상당히 위험한 것도 사실이고요.


물론 대부분의 개들이 그런 위험한 공격성을 가진 녀석들은 아니라고 해도, 개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고 개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에 노출될 경우 개는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고, 주인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개를 잘 교육시킨다는 문제가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를 자극하거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개를 데리고 간다는 것 자체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닌 셈이죠. 



이런 면에서 적지 않은 견주들이 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그 교육과 관리에 소홀하거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번 최시원 집안의 애완견에 의해 발생한 사망 사건의 경우 그 견주 집안이 굉장히 안일하게 개를 교육시켰고, 무책임하게 대했다는 점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하무인하게 나오니 오히려 더 욕먹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개라는 짐승이 인간과 교감을 깊은 수준으로 나눌 수 있는 건 맞지만,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사랑하는 개가 인간을 공격해 살처분 대상으로 글자 그대로 개처럼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그 애정 만큼이나 철저하고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교육을 시키고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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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아이소포스는 언젠가 꼭 리뷰를 작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명작인데, 제가 엄청 게으르다보니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지금에서야 작성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런 버릇 고쳐야 하는데 말이죠..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품입나다만 먼저 도가도의 그림 실력부터 칭찬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전부터 도가도 작가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자기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충분히 어울리고 수준 높은 작화와 드라마틱한 연출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몇 안 되는 그림작가만의 역량이죠.


초반부터 후반까지 도가도의 드라마틱한 연출은 가히 괴물급이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있었는 데, 후반부의 이솝 처형장면이나 초반이나 중간중간 나타나던 야드몬의 압도적 지배자로서의 위엄, 카리스마를 꼽을 수가 있죠.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컷 방식이나 크기 등 연출부터 압도적으로 웅장할 정도로 보는 이름 위압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야드몬은 그러한 연출을 통해 최종보스의 풍모를 가감없이 보여줬고, 그러한 역할에 충실했죠.


특히 마지막 회에서의 종교적 광기와 희생, 죽음과 혼돈을 연출해낸 것은 정말이지 그 누가 그러한 고대적이고 종교적인 수준의 연출을 해낼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씬들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히 매료되고 이입시켜버리는 힘을 지닌 그림과 연출이었지요. 최고였습니다.



아이소포스라는 작품은 그 원작이 되는 이솝 우화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 정말 좋아하는 데, 특히 작가의 역량과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는 지혜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하죠. 김양수 작가의 역량은 정말이지 엄청났는 데, 아이소포스의 스토리텔링은 그 유명한 폴빠 작가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몰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가도 작가의 프로다운 그림실력을 깔고 들어가니 하나의 살아 있는 작품이 되어버리더군요. 초반부터 중간중간 캐릭터로서도, 독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이솝과 캐릭터들은 설화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한 액제식 구성은 작품의 매력과 작품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이끌어나가죠. 사실 남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야기를 이용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솝 우화라는 거 자체가 그러한 설화와 이야기의 모음이기 때문에 작품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연출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고 재미의 요소인 것도 맞고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구조를 아주 잘 짰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은 그 자체로 명작의 요소를 담고 있는 셈이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자유와 복수입니다. 이솝은 태생부터가 야드몬의 것이었던 부모의 자식이었고, 그 부모가 야드몬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죽게 되자 그 대신 자식인 이솝이 야드몬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에게서 자랐던 이솝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부모의 장례를 이유로 결국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렇게 부모에게서 받은 지혜와 명석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던(어렸을 시점에선 아직 멀었지만..) 이솝은 자유를 꿈꾸고 추구하게 되었죠.


이솝에게 있어서 자유란 삶의 존재 가치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를 그렇게 만든 야드몬에 대한 복수 또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족쇄이기도 하고요.


그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과거의 일에 족쇄가 채여진 노예이기도 합니다. 이솝이 결국 그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야드몬이 그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유를 손에 넣었으나 사랑을 잃고 말게 돼죠. 복수를 하기 위해선 2개의 묘를 파놔야 한다는 말처럼 그 대가를 치루게 된 겁니다. 그 대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만은 아닐 뿐이죠.



이솝은 성실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인덕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나름의 매력을 갖추고 그러한 진심을 보였기 때문에 브리와 테오, 알카노스, 야만인 아저씨 등 굵직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 모일 수 있었고 그와 함께할 수 있었죠.


브리는 그 중 이솝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고,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훗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도왔고, 이솝 또한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나중엔 아예 애정과 우정이 사랑이 되기도 했죠. 서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과 비슷한.. 혹은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그걸 표현할 수 없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이솝의 어린 시절은 가혹했고 그만큼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절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죠. 야드몬의 밑에서, 임무를 위해 갔었던 스파르타에서도, 그 이후에서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선의를 기반으로 남을 도왔고 그 행동은 인과가 되어 자신을 돕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단적으로 이솝이 이데스에게 받은 반지를 브리세우스에게 주면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죠. 그 덕에 노예로 팔려나갔던 브리를 이데스가 알아보고 사오며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솝이 진심을 다하며 남들과 대하며 그 선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결과,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죠. 알카노스를 도와 말레우스로 갈 수 있었던 건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요. 그 알카노스가 이솝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이솝은 대답했죠. 나의 소원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름 자유. 이솝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돌아가기만 할 순 없었죠. 야드몬은 결코 이솝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이든 야드몬과 아르키우스의 추적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이솝은 일행과 함께 코린토스로 도망을 가면서 브리와 재회하게 되죠. 그 재회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고 아주 담담했지만 브리의 바뀐 모습이 정말 여신 of 여신이었죠. 이후에도 꾸준히 작화 깡패 여신님으로 나오는 데 역시 여캐는 정말 잘 그립니다..


하여간, 그렇게 도망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솝에겐 불행이 찾아왔죠. 브리는 신병을 앓으며 무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브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브리의 주인인 삽포와 야드몬을 데려오려고 했죠. 야드몬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전부터 계획을 진행해왔고, 브리를 살리기 위해 아예 납치라는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구상하던 사업조차도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나버리죠.


결국 이솝은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드몬에게 가서 동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브리가 무녀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다시 한번 야드몬의 노예가 되죠. 아니,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두었던 족쇄를 드러냅니다. 그는 원래 야드몬의 노예였기에.


그 장면이 참으로 슬픈 비극인데,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인인 브리를 서로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브리가 무녀가 된 밤, 브리와 함께 깨어난 이솝은 서로 밤을 보냅니다. 이때 이솝이 브리에게 깨어났냐고 묻자 브리는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났다면 브리는 무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깨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솝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사랑하고 싶어서. 


그 이후.. 다음날이 오자 이솝은 홀로 꺠어나 무녀가 된 브리를 만나지만 브리는 차갑게 무녀의 거처이니 이방인은 떠날 것을 차갑게 말하죠. 이솝은 말업이 브리를 지나쳤으며, 브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감추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로 찢어지는 가슴을 감추어둘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브리는 지나친 이솝은 다시금 노예가 되었습니다. 야드몬에게 족쇄가 채워진 채 끌려가죠. 처음부터 노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죠. 그는 도망간 것이지 자유를 찾은 것도, 해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부의 시작은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입니다. 아주 긴 시간대를 건너 뛰었지만 원래부터 잘 짜여진 작품이니 독자들은 놀랐지만 뭐.. 명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이솝의 지혜는 여전했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수려하게 이끌어나가며 극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이솝은 노예 신분이죠. 다만 직책이 조금 높은 편인 것으로 보이고요. 야드몬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이솝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시기 이솝은 정신마저 굴복한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야드몬은 아들을 낳았죠. 리케스라는 아들을.


리케스라는 캐릭터는 기실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야드몬의 아버지가 그랬죠. 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식을 왜 낳았을 것이냐는 질문과 대답을 말입니다. 그러나 리케스는 야드몬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고, 야드몬 또한 리케스에게 그러한 무언가를 느끼거나 지배하려는 그런 면도 그리 부각되진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3부의 구체적인 스토리는 생략하고 본다면, 이솝은 수 십년을 야드몬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자유를 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굴복. 야드몬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리케스에게마저 증오할 순 없었고 야드몬과 리케스가 다름을 그는 알고 있었죠. 그가 벗어날 방법 또한 없었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부 시점에서 그는 시도를 했고, 리케스를 돌봐주었으며, 야드몬의 정치 등 그러한 여러 사정이 겹쳐 야드몬의 눈 밖에 나며 인민재판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랑, 브리세우스 앞에서요.



아이소포스는 그리스 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고, 그리스 시대의 작품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고 유명한 장르가 있기도 하죠. 아이소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작품은 비극적으로 끝맺음을 이뤘죠. 이솝은 인민재판을 받으며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는 상황까지 가고, 브리는 자신을 바쳐서 주술을 시행했으며, 결국 브리의 목숨을 대가로 이솝은 자신의 적인 야드몬의 아들인 리케스의 몸과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사모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끝맺게 되었죠. 이솝은 복수를 원했으며, 그것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복수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공허함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죠. 자유란 허망한 것이었을까요? 복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이후에서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대가로 삶의 영혼을 잃게 되었으니, 자유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드몬과 이솝, 브리세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그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는 그 캐릭터성과 작품 내에서의 행적을 보면 정말이지 할 말이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뛰어난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작품 내에선 결코 정을 줄 수 없는 정형화된 악역이긴 하지만, 작품적으로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재창조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기억력의 한계와 유료화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없음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약간, 약간의 편린만을 꺼내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솝


말했듯이, 이솝의 삶을 관통하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복수입니다. 그는 아무런 사실도 몰랐던 야드몬에게 그의 양친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모의 썩어가는 시체를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대가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장례를 치뤄주는 대가로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주 잔혹한 선택지였죠.


그런 그는 야드몬의 밑에 들어가 노예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노예들에게도 따돌림 당하고 핍박 받으면서 지내야 했죠. 야드몬 또한 그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지혜로웠고 현명했죠.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솝에게도 지재가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가혹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를 소유하기 위한 불꽃을 언제나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고 노예로 살면서도 그러한 욕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험 받고, 성취하며, 남을 돕고, 도움을 되돌려 받으며 신뢰 받고 은혜를 주고 받으며 인망을 쌓았죠. 그렇게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유를 손에 넣었고, 먼 이국의 땅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그는 도망나온 것이지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언제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것이죠. 물론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요. 


복수.. 복수란 언제나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고, 결과에서 성취를 느끼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복수는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복수를 원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가 복수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드몬이 이솝을 결코 놔주지 않았거든요. 그가 복수를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야드몬은 결코 그러한 결정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했고, 이솝은 자유를 갈망하기에 반드시 야드몬을 죽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될 수 없었으니.


그 결과 이솝은 원래의 노예 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간의 노력과 인망, 성공과 성취가 무의미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지재가 있어 나름의 성공과 성취를 하며 살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롭지 못했으니까요. 그로서는 동료를 버릴 수 없었고, 그러한 모든 것은 그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동료에게 죄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쓰고 있던 족쇄를 벗어야만 했죠. 야드몬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겁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솝은 두차례 가량 야드몬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었고 불에 타죽게 놔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그러지 않았죠. 나름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솝은 단지 그러한 복수를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복수 같은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 복수라는 족쇄 때문에 이솝의 결말이 파탄으로 이끌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자유란 단순 물리적, 신분의 구속이 아닌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솝은 복수를 포기한 듯한 결단을 내린 것이고, 그것을 나름의 논리로 포장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복수를 행한 이후를 두려워 해서 일 수도 있죠. 정말 모든 것이 끝날까봐.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끝날까봐 말입니다. 복수의 끝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야드몬의 노예가 된 이솝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고 살게 되었죠. 야드몬이 자식을 보며 성공한 삶을 보낼 때, 그의 성공을 이끌어줬던 것은 이솝이었습니다. 증오해 마지않을 원수이자 집요한 지배자인 야드몬을 말이죠. 그러나 이솝인 결국 그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여기까지만 본다면 야드몬은 이솝이라는 인간의 인생과 정신 모두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놈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기도 했죠.


...이솝이 만들었던 인연이 이솝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브리세우스


노예가 된 이솝에게 먼저 다가갔던 아이이자, 우정을 나누고, 동경을 주었던 캐릭터죠. 이솝을 동경하고 이솝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던 아이였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나가게 됐지만, 이솝이 준 반지 덕분에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죠. 그 덕에 당차고 강한 여성이 되어 돌아왔고요.


이솝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조각이 브리세우스 였나면, 브리세우스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은 이솝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성장했고 그를 위해 살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신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브리는 이솝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은 점차 사랑이 되어 나타났는데, 이젠 더 이상 같이 있을 수도 없게 되고, 다시 노예가 됨을 아는 그녀에게 운명이란 신들의 짖꿎은, 잔인한 놀음판이었죠.


이솝 또한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가진 이가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브리의 감정을 받아줄 수 없었던 거고요. 지재가 있으며 사기도 치고 다니던 녀석인데 설마 브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알았겠죠. 알았죠.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자신도 어떻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고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진부하고 진부한 만큼 애닳는 관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는지..


결국 이솝은 자신을 버리며 브리를 무녀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브리는 깨어났냐는 이솝을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나면 자신은 이제 무녀이고, 이솝과의 관계와, 이솝에 대한 감정을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 깨어난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 서로의 감정을 더 이상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아도 되는 마지막 날인 것이고요.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새로운 관계로 정립됩니다. 브리는 이솝을 냉담하게 대하죠. 그 속은 썩어들어갔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솝은 노예가 됩니다.


20년 동안 브리는 무녀로서 충실히 봉사해왔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았고, 남들의 떠받듬을 받았죠. 그러나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그 시간 속에서 무뎌지지 않았고, 단지 감춰지기만 했습니다. 극의 마지막. 이솝이 십자가에 묶여 죽을 것을 알게 된 브리는 무녀로서의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주종관계는 끓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외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겁니다.


브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의 사랑에게, 자신의 인생을 차지했던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자신의 사랑을 구하고자 한 것이죠.


결국 브리는 죽게 되었고, 이솝은 살아남습니다. 리케스의 몸으로요. 그리고 그 이후에나 복수는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수란 그토록 어렵고, 이토록 허망한 것이죠. 이솝이 그리도 바래왔으나 실패하고, 포기한 시점에서나 성공하게 되었으며, 그 또한 자신의 손이 아니었고, 자신이 자신을 버림으로서 살렸던 여자가 죽어 잃고난 뒤에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으니..



야드몬


야드몬은 아이소포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태도가 크게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심리적, 정신적 방황과 충동은 가장 완성도 있고 복잡한 캐릭터죠. 그는 헤파이스토폴리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권력자이고, 지배자입니다. 왕이었죠. 권력을 얻기 위해선 자신의 아내라도 팔아넘길 수 있는 냉혈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자식을 사랑이나 애정의 대상이 아닌 지배와 통제,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을 두려워 하라. 그게 자신의 아들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독하지 못했고, 잔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드몬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죠.


야드몬은 엘리오스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더니, 그말이 사실이었으며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했죠. 그러나 엘리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강제로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자신이 남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랬죠. 아마 이솝의 그 자유를 갈망하는 선청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그녀가 슬픔에 빠져 웃지 않으니, 야드몬은 그녀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론티스라는 광대를 소개해줍니다. 그리고 그의 광대짓에 엘리가 웃죠. 야드몬은 만족했습니다. 그녀가 웃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녀가 웃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땅딸보인 프론티스와 함께 도망을 가게 됩니다. 프론티스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황산으로 뭉갰지만, 그녀가 사랑한 그는 외모가 아닌 그의 지성과 내면을 사랑했었죠.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야드몬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추격자들을 보냅니다. 그 과정은 10년이나 이어졌죠. 10년 동안 한 여자를 찾고자 했던 겁니다. 순정이라면 순정이고, 징그러운 집착과 집요한 강박이기도 한 그의 정신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고로 프론티스와 엘리가 모두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그들의 자식인 이솝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인과 증오하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그 복잡하고 끔찍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했을까요?


결국 그는 꾀를 써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자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인 이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에,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렸던 거라고 봅니다. 사랑할 순 없으나 마냥 증오할 순 없는 그런 아이..


어느날, 야드몬의 아버지 헤파이스토폴리스가 돌아와 엘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낭비한 야드몬을 꾸짖으며, 그렇게 낭비한 병력을 자신에게 원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드몬은 그 원병을 돌려 아버지를 공격하고 살해하죠. 야드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라며 항변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반항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답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소유 당하고 통제 당했으나, 자신의 사랑과 원수의 자식인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면모.. 그만큼 복잡한 캐릭터죠.


이솝에겐 나름대로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을 때도, 훗날 배에 불이 타 죽을 수도 있었을 때도 이솝은 그를 죽이지 않았죠. 그가 추구하는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든요. 처음 이솝이 그를 죽이려 할 수 있었을 때 야드몬과의 대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에게서는 네 어머니의 어떤 것도 볼 수 없구나. 내게서 내 아버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듯이... 라고 말입니다.


이솝은 아버지의 외모를 더 닮았고, 야드몬은 아버지의 내면을 닮지 못했습니다. 이솝은 어머니의 내면을 닮았꼬, 야드몬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소유와 통제를 추구했지만, 그 방식이 전혀 달랐듯이요. 야드몬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하고 집요했으며 집착적이고 강박적이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통제하고 소유하고자 했으니. 왕이자 전사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뱀과 같은 정치인인 야드몬이었습니다.


어째서 야드몬은 이솝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분명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나 신전이었던 엘리의 자식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못하고 잡아 소유하고자 했던 거죠.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뒤틀리고 비뚤어진 겁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거랄까요? 살면서 겪고 배워온 것이 그것이니 그 성향을 받은 것도 있으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수 십년 동안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솝에게 채워진 노예와 복수라는 족쇄처럼 사랑과 소유라는 족쇄가 그를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솝 또한 브리와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인연에 의해 인생이 변하게 되었는 데, 야드몬 또한 그랬다니.. 자유란 무엇일까요? 사랑을 위해, 사랑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살해한 그 또한 자유를 추구했을 것인데.


비록 이솝에게서 엘리의 무엇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솝의 내면은 엘리와 닮은 면이 있었죠. 아니면 단지 과거를 추억하고 회생하게 해줄 매개체로서 그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엘리의 자식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노예 이상이나 그 이하로 만들 수 없는 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를 피상적으로 바라복 되면 평면적인 변태적 집착과 소유욕을 지닌 남자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고 내면이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내면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답게 표정을 다스릴 줄 알고 태도를 갈무리할 줄 알기에 그것을 알기 어렵지만, 그에게 같은 목적을 위한 내면적 상태는 시점에 따라 지속해서 변해간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복잡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을 낳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완성도 있는 캐릭터를 야드몬으로 꼽는 것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해낸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가적 능력과 작품성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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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나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소통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개진하면서 어그로를 끌어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검은사막을 하면서 그런 이를 종종 보곤 하는데, 진짜 불쌍하더군요.


그들은 주로 어떠한 거대 담론이나 사회, 정치, 외교에 대한 썰을 풀면서 자신의 의견을 '전도'하는 행위를 보이는데, 어째서 전도라는 표현을 썻느냐면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에 있어서 어떠한 소통을 요구하거나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나 태도의 본질은, 그들이 가진 내제적 문제 때문이죠. 흔히 말하는 백수 찐따들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직업이나 구체적 능력 없이 단순히 집에서 게임, 인터넷만 주구장창 하면서 지내는 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관계를 이루지 않고 보통 사람과 같은 일상을 겪지 않고 삽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만 붙잡고 사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백수들이 그들과 같은 어그로를 끌고 사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회적 단절을 겪으며 혼자 고립되어 생활하다시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역으로 극심한 사회적 활동이나 관계를 추구하는 무의식적 자극이 발생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죠. 겉으로는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오랫 동안 타인과의 관계 없이 사는 이들은 그 자체로 무언가 문제를 지니게 됩니다. 실제 현실에서 남과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사회성을 기르고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역으로 인터넷이라는 허상 속에서 더 구체적이고 깊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러한 기회에 집착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백수찐따, 방구석 여포, 인터넷 어그로 등이 그러한 이들인데, 더 많은 시간을 인터넷 사회에 투자하고, 그러한 관계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며 그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더 활발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밖에선 소극적이고 숫기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들이, 현실에선 아무 것도 아니고 별 거 아닌 일반인 내지는 그 이하의 존재들이 인터넷에서는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한 소통태도를 보이곤 하는 것이죠.


이러한 적극성과 활발암이 타인과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은 또 아닙니다. 이건 케바케죠.


그런 이들이 그러한 조건 속에서 오래 지내게 되면, 다시 말해 더 오래 사회적 단절을 겪고 인터넷에만 중독되다시피 살게 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어떠한 정신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단지 어떠한 망상에 빠져 있는 걸 떠나서 그냥 자기 스스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들어냅니다. 그 대부분, 적지 않은 부분이 일반인들의 그것과 교집합을 이룬다고 해도, 어딘가 변질되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규정해내고 논리적으로 지적해내기 어려운 것 뿐이죠. 사람의 사례만큼 그 다양성은 많기도 하고요.


그렇다보니 그들은 자기 세계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집착하게 되고, 더 많은 명예와 더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단지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 중 적극적이고 큰 문제 없이 커뮤니티를 장악하는 이들은 네임드가 되어 그 커뮤니티 속에서 나름 인정 받는 회원이 되는 거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냥 문제적 회원으로, 어그로꾼 취급을 받으며 유명해지죠.


즉, 어떠한 능력도, 기술도 없이 오랫동안 사회적 단절을 겪으며 백수 생활에 길들여진 인간은 그러한 조건 속에서 충분히 인터넷 중독증, 혹은 더 나아가 네임드 어그로꾼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었지만 배운 것도 많지 않고 당장 어떻게 먹고 살 기술도 없기 때문에 비전도 뭣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인터넷 세상으로 도피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보니 인터넷 활동의 양상 또한 뭔가 있어 보이는 모습을 원하는 것이고, --어떠한 기본적인 능력이나 지성이 조금이라도 되거나 그 커뮤니티의 수준이 그보다 낮은 경우-- 그게 잘 먹혀서 네임드 회원, 올비가 되어 주름잡는 거고,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의 주장과 표현을 하면서 어그로꾼이 되는 겁니다. 


가령 어떠한 거대 담론에 집착하거나 그에 대해 썰을 푸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경우 자신의 썰이 더 뛰어난 논리와 합리적 분석을 한다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그저 믿음일 뿐이죠. 실제로는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분석이라 이름 붙힐 수도 없는 것을 그저 --본인과 본인만큼 수준 떨어지는 머저리 내지는 꼬맹이 애들에게-- 있어 보이는 듯한 표현을 사용해서 싸질러 놓는 것 뿐이죠.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도 지성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거대 담론에 집착하고 그렇게 논하는 모습을 표현하며 남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고자 하는 정신적 기제인 겁니다. 어그로가 관심을 받으면 더 좋아서 날뛰는 이유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거나, 혹은 어떠한 소통 기회가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아는 게 없고 능력도 없으니 그러한 모든 주장과 썰들은 다 개소리에 불과한 것이고, 그에 대해 헛소리를 계속한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는 이들에겐 어그로로 못 박히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버릇 못고치는 인간, 혹은 아예 그러한 눈총과 비판, 비난을 신경쓰지 않는 철면피도 있습니다만, 전자의 경우 그 짓거리 말고는 진짜 할 게 없는 관심병환자인 불쌍한 놈이고, 후자의 경우 그러한 표현 자체가 남들에게 인정 받고자 함과 동시에 그러한 행위 자체가 자신에게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능력이나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자위수단에 불과합니다. 아예 남들은 날 이해 하지 못한다고 정신적 자위를 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죠.


즉, 모든 어그로 꾼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아예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고, 단절되어 있는 이유는 본인의 인격이나 능력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무언가에 집착하며 자신의 현실, 진실에서 눈돌리고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중독을 낳은 것이죠.


거의 모든 중독자들은 그만한 사회적 고립과 환경의 가혹함 속에서 발생합니다. 담배, 술, 마약, 게임, 커뮤 등등..


어그로꾼들은 단지 그런 중독자 중 하나인 셈이죠. 거의 환자와 비슷한 정도입니다. 아니, 진짜로요. 모든 중독자들은 다 환자들입니다. 어떠한 명확한 질환명이 있는 진 몰라도, 물리적인 약물이 아닌 상황이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중독 또한 중독이죠. 광신이 종교에 대한 중독이듯이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친구도 없고, 밖에 나가서 놀 이유도 기회도 없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인터넷, 게임만 하며 살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하게 되고, 그 세계 속에서 진실은 인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내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터넷에 중독되어 뻘짓거리를 하게 되면 그게 어그로꾼이 되는 겁니다.


또한 이들이 거대담론에 주로 빠지는 이유는 그것이 논쟁과 관심도를 유발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활약,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일약 스타나 네임드, 남에게 기억이 남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이 일상을 겪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대 담론이야 누구나 논할 수 있고 따질 순 있지만, 실제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은 그러한 것에 오랫동안 빠져있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세금, 물가, 직장생활, 학교생활, 교육 등 실제로 피부로 와닿는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거나 그 동향을 알아보곤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정신력, 인지력을 쏟아붓기 때문에 거대담론에 대해 긴 시간이나 노력을 투자하기 어렵게 되죠.


그러나 어그로꾼들이 그러한 담론에 눈독을 들이고 자주 끼어들고 논하려 드는 성질은, 그러한 일상을 피부로 와닿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인터넷, 뉴스만 보면서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사실상 자기가 떠들 수 있는 사회적 무언가 중에서 일상이라는 개념이 거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에 대해서만 논하려 들 것이고, 동시에 그러한 것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글을 쓰거나 일침을 놓거나 제대로된 분석을 내놓는 지식인들의 카리스마를 따라하려는 행위일 뿐이죠.


자신도 그러한 글을 쓰면 더 많은 칭송과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며 남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고 더 높은 명예를 가질 수 있으며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좋아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백수 찐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의 명예와 가치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 가치는 모니터 밖으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는 게 아니죠. 자신이 어느 커뮤니티나 게임에서 유명하고 대우 받는다고 해서 현실의 자신에게 뛰어난 가치나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가 알아봐주지도 않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취업할 때 도움되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나이만 먹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강제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요. 어느 순간 자신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씹창난 인생을 비관하게 됩니다. 이때 그런 어그로꾼들을 박살내는 말이 있죠. 디씨인사이드에서 나온 유명한 말, 너는 몇년짜리 매미일까? 그것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두가지 선택지를 가지게 되죠. 뭐, 사람마다 그러한 정도라는 게 있지만, 아주 심한 어그로꾼들은 다 비슷비슷 합니다. 불쌍한 놈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공해 행위가 정당하다는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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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 국정원, 지역 감정 조장·前 대통령 비하까지


국정원의 선동과 여론조작에 대한 사실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들이 알려졌을까.'


이명박 시절 십알단이란 이름으로 트위터에서 여론조작을 시도하려던 정황을 포착한 이래 점점 더 많은 증거와 정황, 증언들이 발견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조작을 시행해왔는 지 증거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 극우보수 세력의 위험성과 반체제적인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고,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재확인 시켜주는 것들이죠.


국정원은 그저 정권의 시녀이자 충실한 사냥개였고 그들의 본래 목적을 방기한 채 안보적 위험과 국제정치, 외교에 있어서 한국의 역량을 깍아먹는 것에 일조 했음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북한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안보를 강조하면서, 정작 그 대북감시와 정보망을 스스로 박살내고 인력을 갈아버리며 자기들 말 잘 듣는 개새끼들로 하여금 국민들을 이간질하고 선동하여 정치권력적 이익만을 탐냈으니,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이명박 정권 이후 박근혜 정권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죠.


실제로 정상적인 국가를 구조적으로 망가뜨렸으니 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구조적 착취를 당하는 서민들 입장에서 지옥과 같은 환경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및 선동들의 행적을 보면, 지난 보수들의 공공연한 논리와 주장, 표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논리와 표현을 마련하고 사용하기 위해 학자들의 도움을 구하여 본격적으로 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국정원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부분이 일베에서 사용되었고, 일베를 통해 여론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베는 그저 국정원의 선동창구 역할을 했던 것 뿐이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일베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용만 했다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해봐야할 것인 동시에 그러한 일베를 이용하며 국정원의 논리와 표현, 컨텐츠를 구사했다는 것은 당연히 일베를 위시한 극우보수들은 단순히 국정원에게 선동, 세뇌 당한 좀비 새끼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이죠.


누군가 국민들을 레밍이라고 했죠? 사실입니다. 다만 극우보수가 레밍이죠. 정권이, 언론이 이렇게 주장하면 냅다 그 논리와 주장에 어떠한 의심도 비판도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따라가는 나그네쥐, 레밍들. 일베 또한 그런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더 재밌는 건 그런 일베와 극우보수 버러지들의 10년 넘게 써먹고 있는 주장 중 하나가 진보좌파는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선동질한다. 뭐 그런 이야기라는 거죠. 하지만 반대로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십년 동안 극우 정부와 언론, 어용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된 논리와 주장에 선동되어 비판도 없이 움직이고 틀렸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면 입 싹 씻고 아닌 척 하는 금붕어 수준의 지능을 가진 레밍들의 무리였죠.


그 동안 수도 없이 진보와 좌파를 욕하던 이들은 그저 선동 당한 좀비들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일베충 또한 그저 국정원과 보수 언론에 의해 놀아난 좀비들이고 사용 당한 레밍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그럴 기대는 전혀 안 합니다만. 그들이 그러한 현실인식과 자정능력을 갖췄다면 애초에 극우보수짓거릴 안 했을 테니까요.



2016/07/30 - [취미/이야기] - 대중선동의 기본. 분열.


지난 시기, 대중선동에 대한 기본으로서 분열을 일으키고 조장하는 이유와 그 효과에 대해 논한 적 있습니다. 극우세력과 국정원은 그러한 정치적 방법론에 입각해 지난 9년 동안의 정권시기와 그 이전,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분열과 내분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일베와 자유한국당 지지자들, 박사모 등의 극우집단은 그들의 선동과 의도에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놀아나고 있는 거죠. 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닌 남이 넣어준 입력값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좀비들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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